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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념사업

하논성당 설립 김원영 신부

by 나그네 길 2012. 12. 7.

 서귀포성당 110주년 기념사업 뿌리찾기 중에

김원영 아우구스띠노(1869~1936) 초대 주임신부의 생애를 찾아 보았다.

 

 김원영 신부는 

1899년 5월 제주본당을 설립하기 위하여

프랑스 선교사인 페네(Peynet)주임신부 함께 보좌신부로 제주에 들어왔다.

 

<서귀포성당 110주년 성지순례단, 용산 성직자 묘역 참배>

 

김원영신부는 초기 전교활동을

제주도 남쪽 한논(서귀포시 하논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실시하면서,

 

1889년 11월 한논공소를 설립하여 신자 20명 예비자 30명을 두었으며,

 

다음 해 1900. 6. 12 한논본당(현 서귀포성당의 전신)을 설립하여

이듬해 신자수 137명 예비자 620명을 기록할 정도로 왕성한 선교를 하였다.

 

 

 

 

1901년 5월 사제회의차 서울에 출타 중에

제주 신축교안 발발하여 제주에 들어오지 못하고

 

다른 지방의 성당에서 사제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36. 10. 6일 선종하여 용산성당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00년 당시에는

대부분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들이 전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한국인 신부 중에서 7번째 서품을 받은 김원영 신부가

최남단 하논성당(현재 서귀포성당)을 설립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였다.

 

 

1901년 5월 발생한 신축교안으로 제주교회는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고,

 

특히 선교가 활발하였던 한논본당은

신입교우들이 교안의 와중에서 순교하거나 희생을 당해야만 했다.

 

 

 

타케(Taquet 엄택기 에밀리오)신부가 제3대 한논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02년 6월 홍로본당(현 서홍동 면형의 집)으로 이전하였다

 

한논본당의 교인수는 교안 직전까지 137명 이였으나

타케신부 부임 직후 겨우 35명 이였다고 한다.

 

 

 

서귀포성당에서는 2010. 5월 110주년 성지순례를 통하여

김원영 초대신부의 묘역을 찾아 헌화하고 용산성당에서 추모미사를 드렸으며,

 

그후 10. 6일 기일에는

추모미사를 봉헌하면서 분향과 기념 등으로 초대 주임신부를 기리고 있다.

 

 

 

 

 

 

 

 

 

(이하, 세포네 블로그 스크렙, 글쓴이 : 세포) 

 

한국교회사연구소는 1997년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간행 작업 중 오래된 책자 한 점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제주도에 첫 한국인 사제로 부임한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901년에 집필한 「수신영약(修身靈藥)」 한글 필사본이다.

총 43장 분량의 「수신영약」에는 천주교 교리 특징, 천주교에 대한 제주민들의 의식, 제주도 풍습과 미신 등 사료 가치가 높은 글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구한말 가톨릭과 토착종교(민간신앙)의 충돌을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 미신 척결 없이 복음화 여렵다
 1899년 사제품을 받고 곧바로 제주도에 도착한 김 신부는 섬 전역에 만연한 미신 숭배에 혀를 내둘렀다. 제주 사람들은 뱀을 '칠성(七星)할망'이라며 숭배하고, 집에 불이 나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게 다반사였다. 섬이나 해안가 지방은 전통적으로 미신이 강하다 하더라도 그 정도인 줄 몰랐다.

 문란한 풍속도 복음화의 큰 장애였다. 김 신부는 "제주의 주색잡기(酒色雜技)와 축첩(蓄妾)은 대한의 다른 도시는 물론 타국 어느 곳보다 심하다"며 주색잡기를 금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민들의 반(反)천주교 정서도 복음화의 큰 걸림돌이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제주에 진출한 후 교세가 증가하면서 신자들과 도민들 사이에 자잘한 충돌이 빈번했다. 갈등의 골이 깊어져 발생한 사건이 1901년 신축교안이다.

 김 신부는 이런 상황에서 풍속과 미신 타파, 그리고 천주교를 올바로 알리는 일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호교서이자 전교서 성격의 「수신영약」을 저술했다. 문답 형식으로 써내려간 그의 글은 매우 직설적이고 강한 어조다.

 김 신부는 천주교가 서교(西敎)인 까닭에 믿을 수 없다는 데 대해 "불교와 유교도 인도와 중국에서 시작된 서방의 타국교"라고 말했다. 또 천주교는 임금과 어버이 존재를 부정한다는 뜬소문에 대해 "박해시대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를 신봉했기에 붙여진 말인데, 지금은 선교사들이 대황제 폐하의 공문을 갖고 대한 13도를 누비며 천주 성교를 가르친다"고 대답했다.

 횡행하는 미신과 이단적 풍속에 대해서는 단호한 어조로 척결 의지를 드러냈다.

 "남녀가 많은 장부와 아내를 두는 것은 혼인의 도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호색(好色)하며 함부로 놀면 금수와 다를 게 없다. 제주에서 그런 것들이 아주 없어지기를 천주와 성모 마리아께 빌고 있다."

 김 신부는 마지막으로 "제주민들이 육신에 병이 들면 선교사들에게 약을 구하러 오는데, 영혼이 질곡에서 빠져나오면 육신도 무병(無病)하니, 육신에 좋은 약만 청할 게 아니라 영혼에 좋은 약을 구하라"며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호소했다.

 당시 김 신부는 갓 서품을 받은 새 신부였다.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선교 열정이 어느 때보다 투철한 시기였기에 의욕이 넘쳤다. 또한 성품이 강직했다. 하지만 그런 의욕과 기질이 오히려 도민들의 반발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은 측면이 있다.

 김 신부 사목관할구역인 정의군 지역에서 유독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신축교안이 그의 관할구역인 대정군에서 촉발된 것만 봐도 그의 선교방법과 교안 발생에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선교사 라크루 신부는 "김 신부가 재능을 발휘하는데 있어 시간과 장소를 잘못 택한 것 같다"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 신부의 선교 열정까지 깎아내릴 수는 없다. 그는 「수신영약」 말미에서 "영혼에 좋은 약은 진시황의 불사약보다 억천 배나 유익하여 불사불멸할 것"이라며 도민들에게 천주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 성당 봉헌식 때 태극기 제작
 김 신부는 신축교안 발생 직전 사제연례 피정차 서울로 올라왔다가 제주도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황해도 봉산과 함경도 안변 등지로 사목지를 옮겨야 했다. 일종의 문책성 인사였던 것 같다. 다시 제주도로 보내달라는 그의 요청을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는 목포에서 교안의 참상을 전해 듣고 슬피 울어야 했다.

 김 신부의 강직한 성품은 황해도에서도 드러났다. 그가 1935년 일제 강점기에 황해도 정봉성당 봉헌식 때 게양하기 위해 태극기를 비밀리에 제작한 사실이 그의 증손녀뻘되는 김순례(가타리나) 할머니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평화신문 2002년 10월 27일자 보도)

 "9살 때까지 김 신부님과 함께 살았다. 봉헌식에 이어 성당에서 견진성사 예행연습을 하느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태극기는 교황기와 함께 분명히 게양됐다. 태극기 게양이 말썽이 돼 신부님은 봉헌식 다음날 주재소로 불려가셨다. 다행히 그날 풀려났으나 충격이 심했던지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 가을에 선종하셨다."


 

 

▲ 김원영 신부가 성당 봉헌식 때 태극기를 제작, 게양했다는 증언을 발굴 보도한 평화신문 2002년 10월 27일자 보도.


 김 신부 유가족은 2002년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그 대형 태극기를 한국교회사연구소에 기증했다. 태극기 게양 여부를 떠나 일제 감시와 탄압이 극심하던 1930년대에 태극기를 만든 사실만으로도 그의 민족의식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김 신부는 1910년대 수원 갓등이(현 왕림)본당에서 사목하면서 한문서당 '삼덕의숙'을 4년제 초등교육기관 '신명의숙'으로 발전시켜 계몽운동에도 힘썼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 교안(敎案)이란?
 중국, 한국 등 전통 유교사회에서 서구 열강과 외교관계가 수립된 후 반그리스도교 성격의 사회 분쟁이 외교적 절충을 통해 해결된 사안. 한국에서는 1890년부터 20여 년간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토착민들의 배척, 폭행, 추방 형태로 나타났다. 구한말 최대 교안이라 불리는 제주 신축교안은 봉세관과 외세에 대한 도민들 반감이 천주교로 확산돼 촉발됐으며, 양측의 무력충돌로 300~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교회 밖에서는 이를 '이재수의 난'이라 부른다. 몇 년 전 동명의 영화로도 이 사건이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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