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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성당 120년사

신축교안(이재수의 난)과 삼군교폐성책

by 나그네 길 2020. 5. 28.

<이 포스팅은 서귀포성당 120년사의 내용으로 발간될 예정이므로 인용시 확인바랍니다,>

 

제주도 선교 초기 한국 천주교는 백여 년의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18866월 한불통상우호조약으로 얻은 선교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신부들에게 조선 조정에서 호조(護照, 여권)가 발급되었으며, 고종 황제는 여아대’(如我待 : 이 여권 소지자를 임금인 나처럼 대하라)라는 어명까지 내려졌으니, 당시 여러 지방에 파견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천주교 전교와 관련하여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19015월에 발생한 신축교안의 원인에 대한 교회 측의 인식을 보면, 교구장 뮈텔 주교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01526일자 뮈텔문서에 의하면 이 신축교안의 원인에 대하여 대략 네 가지라고 적시하고 있다. 첫째 교세의 확대에 따른 비신자들과 무당들의 모함과 질시, 둘째 세금 징수의 폐단과 관련된 갖가지 문제와 세금 징수관 즉 조정에서 내장원(內藏院) 유지를 위해 파견한 봉세관의 착취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지방관들의 선동과 민란, 셋째 190126일 정의군에서 발생한 오신락 사건의 책임을 교회에 돌린 점, 넷째 직접적인 원인이 된 상무사의 폭동이었다.

 

1901년 신축교안 당시 불타버린 제주시 관덕정

여기에서 뮈텔 주교가 지적하였던 네 가지 중에서 두 번째 원인이었던 교폐에 대하여 삼군교폐사실성책’을 참고하여 서귀포 하논본당 중심의 교폐에 대하여 성찰하하고자 한다.

 

19015월에 발생한 신축교안 당시 조정에서 파견 나왔던 찰리사(察理使) 황기연(黃耆淵)이 작성한 삼군교폐사실성책(三郡敎弊査實成冊)’에 의하면 당시 천주교인들의 교폐가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교폐성책은 당시 교회와 반대 측 민란참여자들과 지방관들이 교민들을 배척하는 일방적인 진술을 토대로 작성하였기에 정확한 진실 여부 확인에 문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교폐 성책에 있는 사례들을 보면, 토지 및 조세 수탈, 어장 수탈, 부채(負債) 묵인, 금전 탈취, 부당한 매매, 신당 파괴와 토착 신앙 배격, 입교 강요, 간통, 산송(山訟), 개인 폭력(私刑) 등 실로 다양하였다.(표 생략)

 

정의군 교폐의 대부분은 경제적인 문제로 야기되었는데(111, 전체의 62%), 그 중에서도 토지ㆍ조세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들 문제는 대부분 관이나 토착 지배세력과 연관되었던 것으로서, 이들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산남지역의 천주교 선교 과정에서 교회 측과 관ㆍ토착세력과의 대립ㆍ갈등이 심각하게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삼군교폐사실성책은 제주목 산하 제주 · 정의 · 대정 3군의 교폐 사실을 조사해서 묶은 보고서이다.

이 중에서 하논성당 관할이었던 정의군교폐성책에는 정의군 거주 천주교인들이 행하였던 교폐의 내용을 각 마을별로 178개 조항에 걸쳐서 작성되어 있으며, ‘대정군교폐성책3군 가운데 대정군의 천주교민들이 행하였던 교폐의 내용을 각 지역별로 48개 조항에 걸쳐서 작성되어 있다.

<정의군교폐성책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대정군교폐성책은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에 보관되어 있다.>

 

교회는 무당들의 무속 행위에 대해서는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제주도를 무당의 폐단이 많은 지역으로 보았고, 무당들의 치부(致富)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신당을 신성시하는 도민들의 정서를 우매하다고까지 보았다. 이러한 극단적인 민간신앙 배격과 제주민들의 삶의 뿌리인 풍습, 관습 등도 이단으로 규정하고 하루아침에 천주교의 신앙으로 바꾸려 하다가 도민들이 반천주교 정서가 확산되어 1901년 제주민란의 원인으로 작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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