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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성당 120년사

제주 교폐(敎弊)의 흑역사, 오신락(吳信洛) 사망사건

by 나그네 길 2020. 6. 25.

우리나라의 천주교회 선교사 중에서 1901년 제주도 선교 초기에 발생하였던 신축교안(辛丑敎案, 이재수의 난)은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1886년 한불통상우호조약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신부들에게 호조(護照,여권)가 발급되었으며, 고종황제는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여아대’(如我待)라는 어명까지 내렸다. 이는 지방관리들에게 외국인 선교사들을 임금처럼 대하라는 치외법권적 지위를 부여해 주는 것이었다. 제주천주교회는 1899년 프랑스 선교사 페네 주임신부와 김원영 보좌신부가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프랑스 선교사의 지위를 이용하려는 일부 신자들에 의하여 여러가지 교폐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제주 천주교 교폐의 흑역사 중에서 1901년 2월 하논성당에서 발생했던 오신락 사망사건은 지역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천주교에 대한 반발을 가져 오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오신락 사건의 근본 원인은 하논본당의 설립에 따른 인근 마을 향임들의 반발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천주교 100년사와 1901년 제주민란 연구(박찬식저) 등 자료에 의하면19006월에 김원영 신부가 하논에 본당을 설치하려고 하자, 본당 부근 마을의 주민과 향임(鄕任)들이 성당의 설립을 방해하고 나섰다. 같은 해 8에는 하효리의 현규석(玄圭石)과 김종팔(金宗八, 風憲), 홍로의 변용세(邊用世) 등이 소장(告狀)을 작성하여 제주 목사에게 진정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원영 신부는 이상규(李庠珪) 제주목사를 찾아가서 이러한 성당설립 방해 사정을 따짐으로써 일단 사건을 무마시켰다. 그러나 하효리 현규석 등은 마을로 돌아가서 교회를 배척하는 글을 목패(木牌)에 새겨서 하효리 소재 집 앞 노상에 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비난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12월 교민 오달현(吳達鉉) 등이 현규석에게 따지러 가다가 현규석의 심부름꾼인 오신락 부자에게 구타를 당하여 오달현은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에 김원영 신부는 190126일 오창헌(吳昌憲) 40여 명이 교민들을 보내어서 사건의 원인자 현규석과 오신락 등을 잡아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규석은 이를 알고 피신하여 버리자, 교민들은 그의 부친 현유순(玄裕順)과 오신락을 김원영 신부에게로 끌고 와서 곤장을 쳤다. 그리고 이들을 하논주막으로 끌고 가서 다음 날 아침 관아에 보고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오신락은 자기에게 맞은 교민 오달현이 죽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날 밤중에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하여 버렸다. 아침에 같은 방에서 자던 그의 아들 두 형제가 아버지의 죽음을 발견하고 관에 알렸다. 오신락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자살한 책임을 현규석에게 돌렸다. 그러나 현규석은 그의 장인이 정의군수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에 의해서 무사하였고, 모든 책임은 교회 측에게로 돌아왔다. 정의군수 김재용(金載鏞)은 시신에 대한 초검(初檢)에서 타살이 아니고 자살한 것으로 결안(決案)하였다. 그러나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이 복검(覆檢)을 할 때는 타살이라 규정하고 교민 오창헌을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이렇게 오신락(吳信洛)의 죽음이 교회 측에 의한 타살인가 아니면 자살인가의 여부는 당시의 자료에도 정반대로 나올 뿐만 아니라 현재의 연구자들 사이에도 상반되고 있다. 향토사가들은 하논성당의 김원영 신부가 무리한 포교를 하는 과정에서 멋대로 주민들에게 사형(私刑)을 가한 결과 오신락이 타살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면 천주교 측에서는 오신락의 죽음을 교민을 구타한 자신의 행위로 피해를 보게 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처벌의 두려움 등에서 비롯된 자살로 규정하였다. 특히 두 아들이 함께 잠을 잤는데 타살의 여지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교회 측의 주장은 이 사건에 대한 풍부한 기록이 남아 있음으로 사건의 배경과 전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위의 오신락 사망사건은 결국 교회의 교폐와 월권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을 증폭시킴으로써, 이후 일반 주민들의 반교회적 정서를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교회 측도 지방관이나 토착세력에 대한 상당한 불신감을 품게 됨으로써 이후 교민들을 더욱 지방관의 지배권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관ㆍ민에 대한 월권을 더욱 강화시켰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논성당에서 발생한 오신락 사망사건은 그 해 5월에 발생한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서귀포성당 120년사 발간할 내용이므로 인용시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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