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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성당 120년사

제주출신 첫 사제, 고군삼 신부 이야기

by 나그네 길 2020. 4. 1.

<이 포스팅은 '서귀포성당 120년사'를 정리 발간할 내용이므로 혹시 인용할 경우 편저자의 허락을 요합니다.>


 제주도 출신으로 처음 천주교 사제가 된 사람은 고군삼(高君三) 베네딕토 신부였다.

그는 우리나라 사제 중에서 77번째 서품을 받은 서귀포성당 출신 첫 사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 침탈에 협조적이었던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의 사목방침과 배치되는 활동으로

1943년 당시 대구교구장이었던 일본인 하야사까 주교에 의하여 환속당하여 고독한 말년을 보낸 사제이다. 

서귀포성당에서는 설립 120주년을 맞아 제주 출신 첫 사제 고군삼 신부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고군삼 신부 서품기념(1929.5.25),앞 줄 오른쪽>


홍로본당 출신이며 제주교구의 첫 사제인 고군삼 베네딕토(1904~1982) 신부는 1904. 2. 24일 제주도 우면(서귀포) 서홍리에서 부친 고한서 다니엘과 모친 오 마가리타 사이에 태어났다. 1904년 홍로성당에서 타케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고(영세대장 7297) 13세가 되는 19171015일에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 소학과 입학하였다

.

성 유스티노신학교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인 1929525일 뮈텔 주교에 의해 한국인으로는 77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고군삼 신부는 신학교 시절에 성적이 뛰어났으며 서품 직후에 유스티노신학교 교수로 임명되면서 초급반(라틴어반)을 담당하였을 정도로 학력을 인정받았다. 이 당시 고군삼 신부는 신비신학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장차 수도원을 설립할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1931130일 전북 정읍과 등천본당 주임으로 사목을 시작한 고군삼 신부는 신자들과 농사를 지으며 방앗간을 운영하기도 했고, 성당 안에 한글 강습소를 마련하여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그런데 강습소에서 한글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주입 시켜 준 것이 빌미가 되어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기 시작하였다. 고군삼 신부가 1931년 신성리 성당 주임으로 재임 당시 정읍 지역의 중심지인 명덕동(明德洞, 현 연지동)에 새 성당부지(350)를 매입하였고, 이곳에 임시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한 뒤 성당을 그곳으로 이전함으로써 신성리성당은 정읍성당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고군삼 신부는 본당 재정에 대한 장부 정리 미숙 등 재정문제를 이유로 교구 참사회에서 징계를 받았으며, 그 후 여러 본당과 수도원 등을 전전하다가 1936년에는 독립운동 또는 공산주의자와의 관계를 이유로 재치권(裁治權)에 제한을 받았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우리나라 침탈과 항일운동에 대한 탄압의 절정을 이르던 시기에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고 있었던 고군삼 신부는, 대구교구 제3대 교구장 하야사까 일본인 주교에 의하여 1943. 8. 31일 개최한 교구 참사회의 재판에서 환속이 결정되었으며 대구교구에서는 고군삼 신부가 제명되었음을 공포하였다. 당시 환속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제주교구 골롬반회 황 페리 신부의 증언을 보면 “1962년 나주본당에서 고군삼 신부와 서품 동기인 김창현 신부(9대 홍로본당 주임)를 만났을 때, 정선에서 왔다니까 고군삼 신부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 주교가 아니고 한국 주교였다면 환속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면서 매우 섭섭해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증언하였다.


고군삼 신부에 대하여 몇 가지 기록과 증언에 따른 환속 이후 행적을 살펴보면, 강원도 정선군 북면 527번지에 37년간 독신으로 은둔생활을 하면서 탄광일 등으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이와 관련 제주교구 골롬바회 황 페리 신부는 춘천교구 강릉성당 보좌신부 당시 정선공소에서 고군삼 신부를 만나 사목 도움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고군삼 신부는 본당 주임신부의 허락을 받아 정선공소에서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고, 1959년에는 견진대부를 서기도 하였으며, 침을 놓는 기술이 있어 신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하였다.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는 고군삼 신부가 강원도에서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들고 고군삼 신부를 찾아 오도록 하여 1980624일 교구에서 운영하는 성가양로원에 입원시켜주었다. 이후 고군삼 신부는 2년여 동안 성가양로원에서 요양하다가. 1982112일 대구가톨릭병원에서 장암으로 78세에 선종하여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소재 성가양로원 묘역에 안장되었다.

 

제주교구에서는 교구 출신 첫 사제인 고군삼 신부의 행적을 찾기 위하여 20171월 문창우 주교(당시 시복시성추진위원장)는 대구대교구를 방문하여 라틴어로 기록된 대구교구참사, 재무위원회회의록을 입수하였으며, ‘고군삼 신부의 환속에 대한 조사 및 연구보고서를 발표하였던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맥락 클라멘스 위원을 면담하고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그리고 성가양로원을 방문 고군삼 신부의 묘소를 확인하였는데, 묘비에는 성명 고군삼 분도, 출생 1904, 1. 11, 사망 1982. 1. 12.’로 적혀 있으나, 본적은 강원도 정선군 북면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평소에 홍로본당 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추었던 것으로 추정했다고군삼 신부의 출생일과 관련 서귀포성당 세례대장에는 1904224일이고 묘비에는 1904111일로 기재되어 있다. 이에 천주교 세례대장의 공신력을 인정하여 고군삼 신부의 생일을 1904224일로 정리하였다.


<고군삼 신부 약력>

 

1904. 02. 24 서귀포 서홍동(홍로)에서 출생

1904. 02. 28 홍로성당에서 유아세례(타케신부)

1917. 10. 15 ~ 1920. 06. 15 성 유스타노신학교 소학과

1923. 09. 15 ~ 1923. 06. 20 성 유스티노신학교 중학과

1925, 09, 18 ~ 1925. 06. 20 성 유스티노신학교 철학과

1925. 09. 12 ~ 1929. 05. 25 성 유스티노신학교 신학과

1928. 06. 02 부제품

1929. 05. 25 사제서품(한국인 사제 중에서 77번째)

1929. 05. 26 ~ 1931. 01 30 남산정 천주당 및 신학교

1931. 01. 30 ~ 1936. 05. 25 전북 정읍 천주당 및 등천 천주당

1936. 05, 25 ~ 1937. 02. 20 대화정 천주당

1937. 02. 20 ~ 1937. 07. 06 함남 덕원군 부내면 어운리 산5번지 수도원

1937. 07. 06 ~ 1939. 05. 14 경남 통영 광도면 황리와 고성 기월 천주당

1939. 05. 20 ~ 1943. 02. 26 경북 김천근 감천, 부상, 향천 천주당 및 성주군 금수 천주당

1943. 02. 26 이후 경남 명진, 예구리, 탑포, 지세 천주당

1943, 08. 31 대구교구 하야사까 주교가 재판으로 제명을 결정 환속

 

1943 이후 강원도 정선에서 신분을 감추고 독신으로 37년을 거주

1980. 06. 24 대구교구에서 운영하는 성가양로원 입원

1982. 01. 12 대구 가톨릭병원에서 사망, 성가양로원 묘지에 영면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 장례미사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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