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위미리는 조선조 이전에 '우미'라는 이름으로 설촌되었을 정도로 오래된 마을이며,
우리 군위오씨(吳氏)는 350년전 '뙤미'에 정착하여 현재까지 뿌리가 이어져 오고 있는 유일한 성씨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를 먹은 후 내가 태어난 위미마을의 새로운 역사를 알게 되었으니 그동안 고향에 무심했던것 같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로 강의나 모임이 힘들어지면서 온라인 화상회의시스템 ‘줌’(ZOOM’)이 새로게 각광받고 있다.
나 역시 처음 접해 보는 ZOOM을 이용한 수요대담에서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내 고향 위미리에 대하여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들었다.
위미항은 1980년대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위미항에 있는 ‘앞개’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포구이다.
앞개는 마을 앞에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제주어로 ‘개맛’이라고 불렀다.
우리 어릴 적 앞개에는 목재로 만든 돗단배가 몇 척 있었고 철 따라 자리, 갈치, 오징어, 솔라니(옥돔) 등을 잡았었다.
지금은 위미항 내에 동쪽과 서쪽에 있는 자그마한 2개의 앞개 포구가 일제 강점기에는 제주와 일본 대판(大阪 오사카)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의 기항지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1922년 당시 제주와 오사카를 오갔던 정기여객선은 1천 톤급의 제2군대환(君代丸 기미가요마루)호와 8백 톤급의 경성환(京成丸 게이조우마루)호, 한일 합작선인 함경환(咸境丸)호 그리고 1천 2백 톤급의 복목환(伏木丸)호 등 4척이나 되었다고 한다.(爲美里史 P65 인용)
일제 강점기 제주-오사카 정기여객선은 제주시 산지항을 비롯하여 7개 면(面) 지역의 포구에 기항했는데,
남원면 지역에서는 가장 항구 여건이 좋은 위미리 앞개 포구를 여객선 기항지로 선정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내 포구들은 1천 톤급 여객선이 정박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니어서 포구 앞바다에 정박하고 작은 배를 이용하여 여객과 화물을 포구로 수송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객선이 이렇게 읍,면 지역 포구까지 기항한 것은 제주도의 일주도로 사정이 여객과 화물을 수송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여 면 단위 포구까지 기항했던 것으로 이해한다.
내 고향 위미리는 앞개 포구에 일본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기항하게 되면서 위미1리 포구 주변에는 여관과 점방(상점), 이발소까지 생겨났으며, 포구 옆 용천수 ‘고망물’을 이용하여 ‘황하소주’ 공장까지 운영될 정도로 번창하였는데,
70여 년전 위미리를 휩쓴 대홍수로 모두 물에 잠겼고, 해방과 4.3사건 등으로 시설과 운영자들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게 되었다.
어느 신부님께서 이러한 위미리 포구의 운영사를 연구하게된 계기는
바로 에밀 타케신부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온주 밀감나무를 도입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동안은 1911년 일본에서 밀감나무의 묘목을 들여올 때 어느 항구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의문이었다. 그냥 막연하게 성산포항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만 했었는데, 이제 위미리 앞개 포구의 역사적 사실로 인하여 감귤나무 도입에 유력한 항구가 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위미리 ‘앞개’ 포구가 1922년 어느 날 갑자기 제주와 일본 대판을 오가는 정기 여객선의 기항지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타케 신부가 일본에서 최초로 온주 밀감나무를 도입했던 1911년 이전에도 위미에는 ‘앞개’라는 포구가 존재했었고 일본을 오가는 선박들이 드나들었기에 그 후에 정식으로 정기 여객선 기항지에 선정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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