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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pol)스토리

제주 민주항쟁의 다른 편에서....

by 나그네 길 2013. 5. 25.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을 보며 떠오른 글>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가 이슈가 되었다는 언론보도를 보았다.

 

대표적인 민중가요로 꼽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으로 희생된 남녀 두 분의 영혼영결식을 위하여

백기완 선생의 쓴 시를 황석영 작가가 노랫말로 붙이고 김종률씨가 작곡하여 헌정한 노래이다.

 

<서귀포 중정로에서 6월 민주항쟁 시위대의 행진>

 

나는 이 노래를 1980년대 집회 현장에서 너무 많이 들었기에

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와 함께 그냥 흥얼거리며 따라 부를 수는 있었으나,

정식으로 노래를 듣거나 불러 보지는 못하였다.

 

아마 우리 세대가 이 노래를 불러보지 못한 마지막 공무원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90년대 이후 입직한 경찰관들은 모두 대학시절에 대부분 집회현장에 나갔을 것이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정도는 기본으로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가수 ‘서영은’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호소력 있는 맑은 목소리로 애잔하게 흐르는 노래를 듣는 순간에

온 몸에 전율이 흐르며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노래 서영은>

 

그동안 숱한 집회 시위현장의 반대편에 서서

군중들이 부르던 노래를 들을 때와 왜 그렇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까?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에

제주시 중앙로의 아스팔트는 뜨거운 뙤약볕에 내리 녹았고 

 무겁고 답답한 진압복 속에는 진땀이 뚜르륵 흘러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위대들이 빌딩위에서 커다란 벽돌 덩이로 머리위를 내리 찍으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듯 방석모에 벽돌 구멍이 뚫리기도 하였고

 

돌맹이와 불타는 화염병을 막아주며 내 생명을 보호해 줄 유일한 친구는

무거운 방패 오직 하나 뿐이었다.

 

그 때도 그 현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쉬지않고 불리워던 노래였건만

그때의 그 노래와 오늘의 이노래는 왜 이리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 서귀포지역 6월 민주항쟁의 또 다른 현장에서 -

 

1987년 6월은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로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4.13호헌 조치로 불붙기 시작한 대학생들이 주축이된 민주화 요구는

6월10일을 기점으로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와 함께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제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제주시 중앙로와 광양로 일대에서 매일 야간까지 이어지는 시위가 있었으며,

우리 서귀포경찰서에서도 경찰관 1개 중대가 매일 동원되어 제주시로 지원나갔다.

 

그 당시에는 밤 2시쯤에 아파트에 들어와 샤워로 최류가스를 제거하고

겨우 눈만 붙이다가 일어나면 다시 출동을 가는 업무를 반복하면서

식사는 중앙로 아스팔트에서 눈물젖은 빵과 우유로 때울 때가 보통이었다.

 

1987년 6월 26일 저녁은

서귀포 지역에도 사상 처음으로 민주화 시위가 있었던 날이다.

경찰에서는 6.26일 저녁 6시에 매일시장 중앙어린이 놀이터에서 시위를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서귀포경찰서 진압부대와 전경대 2개 중대 등 총 300여명이 경력을 동원하여 대비하였다.

 

그날 오후가 되자 경찰경력으로 어린이 놀이터를 에워싸고 처음부터 출입을 금지시켰으나 

저녁 시간이 가까워 옴에 따라 놀이터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서귀포 중앙어린이 놀이터 경찰 저지선 돌파(이하 사진 서귀포 6월항쟁사업회) >

 

저녁 6시 복자성당에서 6시를 알리는 3종소리에 따라 

복자성당 안에 숨어있던 시위주동자들이 성당쪽 놀이터 담을 타고 넘어오면서 "민주주의 만세"구호를 외쳤고

주변 학생과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경찰저지선이 뚫리고 시위대는 매일시장 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동명백화점 앞에 이루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삽시간에 500여명 이상으로 인파가 불어났으며

경찰경력으로는 도저히 진압할 수 없어 1호광장 쪽으로 진출을 못하도록 막기만 하다가

밤 10시가 넘어서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상황은 자연적으로 종료되었다.  

 

다행히 서귀포시 지역은 돌맹이와 최류탄이 없이 평화적으로 시위가 마무리 되었으며,

경찰 경력이 모자라 해안부대 전경까지 동원 했으나 이들은 방석복도 방석모도 없어

철모의 화이바만 쓰고 진압부대로 동원되었으나 일부 시민들은 군인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 날 이후 서귀복자성당과 중앙어린이 놀이터는 서귀포의 민주화 성지로 변모되어 갔다.

 

그 장소는 제주개발특별법 반대, 4.3항쟁 추모, 모슬포공군기지 반대 등 많은 집회시위가 있었으며

한 청년은 제주개발특별법 반대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 자살하기도 하였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이 들은

며칠 전부터 경찰의 검거를 피하기 위하여 복자성당 지하로 숨어들어갔고,

수녀님의 도움을 받아 식사를 해결하는 등 집회를 준비하는데 노력하였으며,

서귀포YMCA사무실에 유인물을 인쇄하러 갔던 주도층 인사가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결국 6월 항쟁은 6.29 선언이 있을 때까지 매일 지속되었으며,

지금 현직 도의원을 포함한 서귀포 지역의 몇명의 청년들은 민주항쟁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세월이 지난 지금 어느 행사장 등에서 잠간 만나게 되면 지난 이야기와 함께 서로 웃음을 나누기도 한다.

  

< SY44 최류탄 발사기 : 최류탄을 멀리까지 쏠 수 있는 진압장비>

 

당시에는 제주에서도 돌맹이와 화염병과 최류탄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밤 9시쯤에 제주시 칼호텔 건너편에서 앉아서 쉬고 있는데 화염병의 기습을 받았으며,

동료 직원 몸에 불이 붙었으나 바로 소화기로 끌 수 있어서 화상을 입지는 않았다. 

 

제주시내에서 시위대와 부딪치면 반드시 보도블럭을 깨서 만든 돌맹이 세례를 받는다.

이 때는 방패조가 앞에서 잘 막아 주어야 하는데 틈새로 날아온 돌맹이에 많이 다치기도했다.

 

이러면 경찰에서도 최류탄을 쏘게 된다.

진압부대는 1인당 사과탄 2개씩 가지며, SY44 탄은 소대당 1명씩 배치한다. 

먼저 방독면을 착용하고 최류탄을 쏘게 되는데 최류가스는 너무 매워서 활동하기가 불편할 정도이다.

그래도 방독면이 불편한 사람들은 코를 화장지로 막거나 코밑에 치약을 바르기도 한다.

 

최류탄이 주변에 떨어지면 기침과 함께 눈물이 나오며 얼굴 피부가 너무 따가워 진다.

결국 깨끗한 물로 씻어 내는 수 밖에 없는데 어떤 가게에서는 최류까스를 씻을 수 있도록 하기도했다. 

 

    

< 서귀포 중앙어린이놀이터에서 경찰이 항의하는 시위대 체포>

 

그래도 당시에는 경찰과 학생 사이에 낭만이 있었다.

최류탄을 사용안하면 몇시에 집회를 종료하겠다는 등 집회측 주도자와 약속하고

그 약속시간까지는 경찰에서도 강제 진압을 하지 않고 지켜 보기만 한다.

어떤 때는 보도용 좋은 그림을 위해 진압부대와 학생들이 부딪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강경파들이 득세하면 화염병이 날고 최류탄을 쏘고

진압부대 경찰이 돌맹이를 맞으면 흥분한 전경들이 돌을 집어 던지기도 하였고

시위대를 향해 사과탄을 던지기도하는 등 여기 저기 부상자가 많아 겁이 날 정도이다.

 

6월 민주항쟁 기간동안 화염병을 맞아 한쪽눈이 실명하는 부상을 입은 경찰관이 있었고,

그리고 화염병이나 돌맹이에 맞는 등으로 부상을 당한 경찰관은 셀 수 도 없이 많았다.

아마도 학생이나 시민들도 많이 다쳤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서울에서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듯이

제주에서는 중앙성당이 학생들이 최종 피난처로 활용되었고

서귀포에서는 서귀복자성당이 6월 민주항쟁의 보금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밤이되면 서귀포시내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청년들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당시 금지곡을 부르는 사람들을 검거하기 위하여 출동하기도 하는 등

6.29선언으로 정치권이 개헌논의를 할 때까지 산발적으로 시위가 이루어 졌다. 

 

이렇게 서귀포지역에서도 6월 민주항쟁의 마지막 시점에

청년들이 주축으로 민주화 시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기록은 거이 없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6월 민주항쟁이 국가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기념하게 되었고,

극심한 시대적 혼란과 무질서를 바로 잡으며 국가 사회의 버팀목이 되었던 경찰은

6월 민주화 운동을 방해했던 세력으로 여기 저기 기록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시는 정치인들의 권력욕에 의하여 우리 국민끼리 피를 묻혀야 하는 그런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제주 4.3사건이나 5.18민주화운동이나 6월 민주항쟁이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서는 안된다. 

 

성경에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하고 손을 씻으며 자기는 죄가 없다고 변명한 것처럼,

우리나라 공직자들도 국가라는 이름으로 온갖 잘못을 저지른 후 자기 죄를 변명하는

이 시대의 빌라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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