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당사람들

황사영 백서를 생각하며

by 나그네 길 2013. 10. 22.

최근 우리 정치계에서는 역사교과서 문제로 시끌벅적하다.

책을 쓴 저자들이 편향적 사관에 의한 역사 기술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사학자들이 기록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인지 의문이 든다.   

 

<너무나 가슴 아픈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사>

 

서귀포성당에서는

지난 주부터 매주 금요일 역사 영성세미나를 실시하고 있다.

무려 7주에 걸쳐 유명 강사를 초빙하여 하루 2시간씩 강의를 하는데,

가톨릭과 관계된 역사를 통하여 좀 더 깊고 새로운 영성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영성세미나의 강의진과 주제를 보면,

첫 주에는 대구가톨릭대학교 김길수 교수가 내려와

황사영과 신유박해(정난주 마리아)에 대하여 강의를 해 주었다. 

 

 

그리고 2째 주부터는

제주시청 현미혜(레지나) 자매 : 천주교 4대박해

3주 용수성지 허승조 바오로 신부 : 성 김대건 안드레아

 

4주에는 제주대학교 박찬식 교수 : 4.3사건

5주 광주가톨릭대 교수 문창우 신부 : 신축교안

 

6주에는 서귀포성당 현요안 신부 : 한국천주교회사

그리고 마지막 7째 주에는 강우일 베드로 주교님의 마무리 강연으로 계획하고 있다.

 

 

성당에서 실시하는 역사 교육은 처음이기에

호기심으로 첫 강의를 받았는데 예상외로 새로운 느낌을 받게되었다.

 

이제까지 나는 가톨릭 신자를 자처 하면서도

황사영 백서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겨우 학생때 주어들었던 것 정도

 청나라 등 외세를 등에 업고 천주교인들을 구하려고 백서를 썼는데

중국에 가기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했으며,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 왔으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귀양가서 생을 마쳤다는 것 정도,,, 

 

 

황사영은 정약현(정약종의 맏형)의 사위로서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전파에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는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길이 62㎝, 넓이 38㎝의 흰 비단에 붓으로 한 줄에 110자씩 122줄

모두 1만 3,311자를 잔글씨로 깨알 같이 쓴 편지이다.

 

이 백서에서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죄 없는 백성의 탄압 과정 등을

상세히 고발하는 내용에 놀란 조정에서는

대부분의 내용을 없애고 조정에 문제가 되는 부문만을 발췌한 

967자의 가짜백서를 만들어 청에 제출하였다고 한다.

 

 

이 백서에 문제가 되는 내용은 세가지로

1. 교황이 청나라 황제를 압박해 조선에 칙령을 내려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해줄 것,

2. 청이 국경지역에 무안사를 설치해 조선을 감독하면서 청나라의 부마국으로 만들 것,

3. 서양 군함에 병사 수만 명을 싣고 조선에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무력시위를 할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황사영(알렉시오)은

2013년 2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선정한 133위 순교자 시복 대상자 중 한 명이다.

 

그동안 황사영이 작성한 <백서>의 내용이 윤리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신유박해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 중 하나였던 황사영의

시복 추진이 수차례 보류되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황사영은 1775년 조상 10대가 조정에서 벼슬을 지넸던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17세 때 진사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 했는데 답안 문장에 감탄한 정조임금은

황사영을 직접 불러 손을 잡고 20세가 되면 중용을 약속하면서 학비를 하사하였다.

 

조선시대 역사를 통하여 십대에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김시습, 성삼문, 맹사성이 그들인데  황사영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를 알 수있다.

 

이렇게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큰 벼슬과 장래가 보장된 황사영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백서까지 쓰게된 사연은 무엇일까?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은 유교주의에 대한 맹종으로

당쟁을 일삼으면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길거리로 내몰았다.

 

자신들이 권력 유지를 위하여 오로지 성리학 뿐으로 다른 학문은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사상적 탄압과 독재가 지속되던 시기였는데,

 

국기를 혼란시키거나 민란을 일으키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평등과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천주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황사영이 숨어서 백서를 썼던 베론성지의 토굴>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사영의 백서를 거론하면서

그 백서를 써야만 했던 원인에 대하여는 생각해보지 않는 우를 범하고 있다.

 

만약 이시대에 국가권력에 의하여 죄없는 수백명의 국민을 잡아 죽이는

그러한 인권과 사상적인 탄압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북한에서 김정은 정권의 인권 탄압을 피하기 위해

우리나라나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면 

과연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황사영은 백서를 통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과 신앙을 가진 형제들을 위하여

교황청에 이러한 고통에서 구원해 주기를 기원하는 탄원을 했을 뿐이었다.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순교자 황사영의 묘>

 

신유박해 莘酉迫害 (1801, 순조1)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한 봉건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1801년 11세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노론벽파(老論僻派)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천주교도들이 있는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고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이 박해로 정약종을 비롯한 황사영,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는 등 100여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는데,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아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와 현대의 역사를 구분하는 시점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가 있고 없느냐로 구분한다(김길수 교수)"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와 133위의 시복시성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