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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사람들

한국 천주교 4대 박해(강사 : 현미혜 레지나)

by 나그네 길 2013. 10. 26.

 가을이 오색으로 익어 가는 2013. 10. 25일 밤에

서귀포성당에서는 한국천주교 4대 박해를 주제로 두번째 역사영성세미나가 있었다.

강사는 제주시청 공무원 현미혜(레지나) 자매님인데 본당 현요안 주임신부님의 누님이기도 하다.

 

 

현미혜(레지나) 강사님은 

천주교제주교구가 ‘2008 바오로해’를 기념 제작해 전국에서 공연된 뮤지컬 ‘사도 바오로’ 원작자 이며

2010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를 다룬 연극으로 미국공연까지 가졌던  '바보 추기경'을 쓴 극작가로

 

천주교계 뿐만아니라 연합통신 등 언론을 통하여

선천성 장애와 암까지 이겨낸 공무원 감동의 스토리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현미혜 강사님은 문화기획 IMD에서 다음 작품으로 '황사영 백서'를 예정하고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과 박해와 순교 과정 등 한국 근대사에 대한 오랜 시간 연구를 했다는데,

 

일반신자들에게 알맞는 쉬운 내용의 막힘없는 강의를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4대 박해에 대하여 어느정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1784년 이승훈(베드로)가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음으로서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성조 이벽(세레자 요한) 등 젊고 유능한 평신도들에 의하여 자생교회로 발전하여 오다가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년(1839년), 병오년(1846년), 병인년(1866년) 등 4대 박해를 당하면서

1886년 한불수교조약으로 천주교를 인정할 때까지 100여년간 박해의 역사를 이어왔다.

 

이러한 박해는 조선 정조임금이 탕편책으로 용인해 왔던 서학을 

순조(11세) 즉위후 수렴청정을 하며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 정순왕후가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당쟁의 수단으로 천주교인을 박해 정쟁으로 인한 희생이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박해의 빌미를 주었던 것은 조상의 제사문제였다.

 

중국에서는 초기에 예수회 신부들이 선교하면서 배공 제조(拜孔祭祖)

즉 공자(孔子)를 공경(恭敬)하고 조상(祖上)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허용하는 입장이었으나,

 

 도미니코회와 파리외방전교회 등에서 교황청에 이의를 제기

우리나라에는 윤유일 바오로를 통하여 조상제사 금지령을 내리므로써

많은 양반층 신자들이 떠나고 윤지충 바오로의 신해사옥 등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조상제사 금지 문제는 1939년 교리로 제사를 허용할 때까지

한국천주교회의 딜레마로 이어져 왔던 아주 중요한 문제인것 같다.

 

 

4대 박해 과정에서 외국인 신부님들이 많은 희생을 당하였는데

최초 주문모 신부님를 비롯하여 엥베르 주교님은 도망을 가지 않고 자수를 하여 순교하였다.

 

마치 베드로 사도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다가

주님을 만나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쿼바디스 도미네"를 연상케 할 정도로

신자들이 잡혀서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수하여 순교를 택했던 것이다.

 

4대 박해로 순교한 외국인 사제가 12명이었는데

주문모 신부님을 제외하고는 신자들이 사제의 시신을 훔쳐내와 전부 보존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훈련도감이었던 박순집(베드로)가 목이 없는 3분 신부님 시신을 업고 양손에 껴안고

효수당한 3분 신부님 머리는 수염을 꼬아서 입으로 물고 옮겨 몇십리를 걸어 안장을 했다고한다. 

 

 

이렇게 조상제사 금지 문제로 양반층에서 천주교를 떠나가자

더 많은 중인과 하인층에서 천주교에 귀의하여 한국천주교의 뿌리가되었으며

 

4대 박해 과정에서 

조선 천주교 신자 총 2만여명 가운데 1만여명이 순교를 하였는데도

순교자들이 신앙을 굽히지 않는 의연한 순교에 감화를 받아

오히려 신자들이 계속 증가하는 선교가 된 것은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일 것이다.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신유박해 莘酉迫害 (1801, 순조1)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신부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노론벽파(老論僻派)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고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렸다 이 박해로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당했다주문모신부를 비롯 100명이 처형되고  400명이 유배되었다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해박해 己亥迫害(1839년 헌종 5)
1839 3~10월 계속된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 70명이 시성 됐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 했지만 7,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9 21,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병오박해 丙午迫害(1846 헌종 12)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 6 5,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 평신도 8명 등 모두 9으로 1984년 모두 시성 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 16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杖死)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순교자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를 위시하여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남경문(南景文) 베드로,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우술임(禹述任) 수산나, 임치백(林致百) 요셉, 김임이(金任伊) 데레사, 이간난(李干蘭) 아가다, 정철염(鄭鐵艶) 가타리나 등이다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1873년 고종 3)

조선조 말기인 1866년 초에 시작돼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 됐다.

 

 가톨릭대사전에서  103위 시성 감동·의미 되새겨 -- 발행일 : 200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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