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해녀(海女)
언제부터 제주도에 해녀가 생겼는지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문헌으로는 1105년(고려 숙종 10) 탐라군(耽羅郡)에 부임한 윤응균이
"해녀들의 나체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린 기록이 있으며,
조선조 1629년 이건의『제주풍토기, 규창집』에 "潛女(잠녀)"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최고 9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제주의 특수한 풍습이며 제주민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우리 제주민들에게 있어 해녀는 생활 그 자체였으며,
해녀의 작업인 '물질'로 힘든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해녀들이 물질하러 바당에 들어가면 약 2시간 정도 작업을 하는데,
맨 몸에 소중이와 물적삼만을 입고 물질 하기 때문에 물 밖에 나오면 너무 추워서
불턱을 만들어 불을 쬐며 몸을 녹였는데 최근에는 고무 잠수복을 입어 해결되었다.
오래된 제주민이라면 누구나 해녀와 연관이 있다.
나도 어릴적에는 누님들이 있었으며 결혼 후 장모님도 해녀였다.
1960년대 제주해녀들 대부분 육지로 물질하러 나갔다.
내 기억으로 우리 누님은 매년 봄이 되면 마을 해녀 20여명이 모여
울산 지역으로 물질하러 갔다가 가을 추석이 다가오면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 때 그시절 나는 누님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여름이 지나가 시작하면 어머니에게 누님이 돌아오는 날자를 물어보고
매일 아침마다 손꼽아 가며 누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 시절 나는 누님네가 얼마나 힘든 해녀 생활을 했는지 전혀 몰랐다.
단지 육지에 물질하러 나갔다 돌아올때 추석명절에 입을 새 옷을 사와야만,
비로소 가을 옷으로 갈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는 일년에 명절 때를 맞추어 옷을 세벌만 사 입었다.
겨울 옷은 정월명절, 여름 옷은 단오명절 그리고 가을 옷은 추석명절에.....
그래서 새옷을 입는 명절날이 더 좋았는지 모른다
제주의 해녀들은 주로 메역(미역)과 구쟁기(소라), 조개(오분작)를 잡았으며,
아울러 '몰망'과 '전복' 그리고 '해섬'과 '성귀'도 함께 채취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메역허지날(마을주민 전체가 함께 미역을 따는 날)이었다.
미역은 봄에 새 미역이 나서 가을에 다 자란 미역을 채취해야 하기에
여름까지는 미역을 따지 못하도록 바닷가에 대나무를 여러개 꼽아서 표시를 해놓았다.
그리고 9월말에 가장 물이 잘싸는 물때(간조)를 이용하여 메역허지를 하게된다.
'메역허지' 날은 동네 어촌계장이 해녀 상군들과 의논하여 결정하는데,
온 마을 해녀들은 물로 남정네와 노인과 아이들까지 다 바닷가로 동원되며
엿장시와 풀떡장시, 빵떡집 하르방도 다 나와서 수백명이 마치 마을 축제장을 방불케한다.
아마도 위에 있는 그림들은 메역허지를 하는 날 찍은 장면인것 같다.
우리 마을 위미리에서는 100여명이 해녀들이 물적삼 옷을 갈아입고 기다리다가
낮 12시쯤에 어촌계장이 높은 바위에 올라서서 호루라가를 길게 불면 바다로 달려나가는데
망사리를 어깨에 메고 손에 호미(낫)를 잡고 달려가서
마치 펭귄들이 입수하듯이 차례로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물질을 잘하는 상궁들은 30여분 만에 메역을 한 망사리 따고 나오면
남정네들이 메역 마중을 하고 해녀들은 다시 물로 들어가게 되는데
밀물이 올 때까지 약 세시간 정도 메역 물질을 한다.
이 때 아이들은 메역을 가져다가 엿이나 풀떡으로 바꿔 먹기도 하고
남자 어른들은 미역을 여러개 붙이며 길이를 맞추어 널어놓는다.
이렇게 마을앞 바다를 구역별로 '메역허지'하고 미역을 말려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 당시에는 집안의 여자들은 모두가 해녀였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딸까지 3대가 물질을 하는 집안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가진 여성이나 젖먹이 아이가 있는 산모도 물질을 하였는데,
바다에서 물질하는 동안 어린아이들이 울음소리가 여기저기 들리곤했으며
해녀가 바다에서 나오면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풍경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 검질(잡초) 불로 저녁을 해먹고
다음날 다시 물질을 나오는게 우리 누님네 제주 해녀들이 삶이었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태왁과 망사리와 눈(물안경)이 있다.
태왁은 잘 익은 박에 작은 구멍을 뚫고 속을 파넨 후 그늘에서 말리어서 만드는데
구멍을 밀로 봉하면 바닷물에 잘 뜨기 때문에 해산물로 망사리가 가득차도 잘 지탱해준다.
그러나 최근에는 태왁은 모두 스티로폴로 바뀌어 진짜 태왁을 볼 수가 없다.
해녀들이 장비에는
비창과 호미(낫)과 골갱이(호미) 그리고 소살(대나무로 만든 작살)이 있다.
이 중에서 비창은 바다물 속에서 전복과 조개 등을 채취할 때 쓰였고
호미는 미역이나 몰망을 채취할 때,
골갱이는 돌구멍 속에 있는 소라를 파넬 때,
그리고 소살은 대나무에 쇠꼬챙이를 끼워서 만드는데 물고기를 잡을 때 쓰였다.
그러나 해녀들은 물질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리밭과 고구마 그리고 조밭에 검질메러(잡초 뽑기)가기도 하였고
남정네 어부가 목선으로 낚아온 생선을 팔러 다니기도했다.
우리 어머니도 자리(자리돔)와 갈치, 솔나니(옥돔) 등을 지게에 짊어지고
웃드리(중산간) 마을에 팔러가곤 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제주해녀는 살아있는 제주의 역사이다.
얇은 무명옷 하나만 입고 일 년 열두 달 차디찬 바닷물에 뛰어 들었던 해녀,
겨울바다에서 물질을 끝낸 해녀들은
불턱(바닷가에 불을 피워놓는 공간)에 모여앉아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못다 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던 것이 유일한 휴식이었다.
제주도 사람들 모두의 가슴 속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해녀 누님네의 추억들을 이제는 영원히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해녀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70년대에 1만4천명에 달하던 제주의 해녀들이 이제는 불과 4천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중에서도 60대 이상 고령자가 80%이상으로
이들이 은퇴하기 시작하는 10여년 후에는 급속하게 해녀의 숫자가 줄어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20년 뒤에는 천명 미만으로 줄어들어 해녀를 보려면 박물관에야 가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주의 해녀는 단순한 여성의 문제가 아닌것 같다.
돌과 바람과 여자로 대변하는 제주의 고유한 문화이며
세계에 널리 알리고 보호해야할 자랑거리이기도하다.
이제 사라져가는 해녀들을 보호하고 해녀의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하고
유네스코에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어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때이다.
제주해녀의 장비
①해녀복 『소중기』,『소중이』,『속곳』이라고도불렸으며,물질할때뿐만아니라부녀자들의속옷으로도많이입었던옷이다. 소중기의특징은입고벗기가편하고,품조절여유의공간이되는옆트임이있다. 처음에는흰색이많았으나물질할때쉽게얼룩져서검은색등짙은색천에물을들여만들었다.
어깨끈을손바느질로누볐으며,옆은단추매듭(벌모작)과끈으로여며임신등신체의증감에따라조절할수있도록하였다. 전통해녀옷으로는소중기,물적삼,물수건등을포함한다.
②물소중이 해녀들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할 때 입는 작업복으로 매우 기능적으로 만들어졌다. 재료는 백색 무명>백색 광목>검정광목>합성섬유로 변하였다. 1970년대부터 고무옷이 나오면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소중이'라고도 한다.
③물적삼 물적삼은 소중기 위에 입는 흰 무명옷으로 일상화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물의 저항을 고려해서 소매통이 좁고 여밈은 단추매듭이나 단추로 하였다.
④물수건은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보온을 위한 것이다. 뭍에서는 햇빛을 가리는 모자로, 또 물질 할 때는 머리카락의 흐트러짐을 막고 머리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다양한 기능이 있다. 너비 30cm 길이 80cm내외로 이 수건은 바다의 무법자 상어퇴치용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바다에서 상어를 만났을 때 손에 잡고 길게 풀어흔든다. 상어는 자기보다 길이가 길면 슬그머니 사라진다고 한다.
⑤물안경 '滄鏡'이라고도 한다. 오동나무판자를 대어 마름모꼴의 통을 만들고, 그 밑에 유리를 박았다. 동해안의 어부들은 1945년 전후쯤에 이런것이 등장하였다고 입을 모은다. 그 전에는 문어의 내장 썩은 것을 왕대로 만든 통에 담아 주면서 솜방망이에 찍어 물위에 뿌리면 물 속이 훤해졌다고 한다. 썩은 내장을 '푸름', 그것을 담는 그릇을 '푸름통'이라고 했다.
⑥물체 솜에 넣어 누빈 긴 상의. 겨울에 보온용으로 걸친다.
⑦뚜데기 숄의 일종. 더러움이 잘 타지 않는 빛깔의 두터운 옷감에 솜을 넣어 누빈 보온용 숄이다. 바다에서 작업하고 나와 이것을 어깨에 둘러 등을 따습게 하면서 몸을 덥히는 용도로 사용한다.
⑧까부리 물수건 대용으로 썼던 모자. 방한모와 비슷한 형태로 목부분에는 넓은 프릴을 달았으며 귀 부분에는 물이 빠지도록 구멍을 뚫었다. 목이 햇볕에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모자로 멋을 부리려고 젊은 해녀들이 사용했다.
⑨망시리 ‘망사리’라고도 한다. 해산물을 채취하여 담아 넣는 그물주머니이다.
⑩빗창 길이 30cm 내외의 길쭉한 쇠붙이로 해녀들이 물속 바위에 붙어있는 전복을 떼어내는데 쓰인다. 빗창은 머리끝에 둥글게 끈을 달아 손을 넣어, 빗창을 잡았을 때 빠지지 않게 하고, 전복을 채취할 때 지렛대 역할을 한다.
⑪테왁 테왁의 재료는 박이기 때문에 태왁이라 불리었다. 잘 여문 박을 따내어 둥그런 구멍을 뚫고 박씨를 빼낸 다음 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구멍을 막아 만든다. 해녀들이 바다에서 올라와 숨을 고르며 쉬는 장소의 역할을 하므로 가슴에 품어 안기에 알맞은 크기의 것을 선호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스티로폼으로 된 테왁으로 바뀌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의 목동, 쇠테우리 (0) | 2013.12.03 |
---|---|
넉동배기(제주판 윷놀이) (0) | 2013.11.27 |
2013 한국실험예술제를 기다리며... (0) | 2013.11.01 |
'에뜨랑제' 블로그 운영 1주년을 맞으며, (0) | 2013.10.27 |
학도병의 편지 (0) | 2013.10.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