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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제주의 목동, 쇠테우리

by 나그네 길 2013. 12. 3.

 요즘 페이스북 '유니세프'를 통해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나는 그림들을 보면서 비록 가난했지만 슬프지 않았던

그리고 쇠테우리 당시에 이렇게 더러운 물도 먹으며 자랐던 

우리 제주 아이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곤 한다.

 

 

제주는 가난했던 유배의 땅이었다.

 

삼성혈 신화와 탐라국이었던 시기는 옛날 이야기일 뿐,

고려 숙종 때 합병되어 유배지로 슬픈 역사를 갖고 있을 뿐 만아니라

제주사람은 육지로 나갈 수 없도록 출육금지령까지 내려졌던 제주였다. 

 

그래서 20세기초에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으로 수백명이 학살되었고

일제 점령기를 거쳐 20세기 중반 4.3사건으로 수만명이 희생 당했어도

변방의 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국민들이 관심을 끌지 못했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 끝났어도 제주민들은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바람과 돌이 많은 척박한 농토에서는 생산되는 보리와 고구마가 주식이었으며,

우리의 어린시절인 1960년대에도 원시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국민학교에서 점심시간은 대부분 굶고 보낸다.

잘 사는 집 몇몇 아이들만 도시락을 들고 올 뿐

나머지 아이들은 점심시간 내내 그냥 뛰어 놀면서 고픈 배를 달랬다.

 

그리고 몇십원하는 월사금(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교무실에 불려가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에서는 집집마다 소와 돼지를 키웠다.

소는 밭을 갈고 바래기(마차)를 끄는 밭농사의 중요한 축이었으며

돼지는 돗거름(퇴비)과 새끼돼지를 팔아 소득원으로 활용하였다. 

 

소는 '쇠막'이라 부르는 헛간에서 키웠는데

가을이 되면 소가 겨울에 먹을 '쇠촐'(마른 풀)을 베어 말리고

마당 한 구석에 촐눌(촐 짚단을 쌓아올린 것)을 만들어 저장했다.

 

그러나 봄과 여름에는

동네 30여가구가 순번제로 소풀을 먹이러 들로 나가는데

이렇게 '쇠 곡끄는 사름"(소를 돌보는 사람)을 '쇠테우리'라고 하였다.

 

이 때 쇠테우리는 아래의 사진처럼 아이들이 몫이었다.

보통은 쇠테우리 2명이 아침에 소 30여마리를 몰고 들로 나가 풀을 먹이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집집마다 돌려 주는데 소들이 스스로 알아서 집으로 찾아간다.  

 

 

내가 어릴적엔 '쇠고꾸는 날'이 되면 국민학교를 결석해야 했다.

 

그리고 차롱(대나무 그릇)에 보리밥과 자리젖 반찬을 싸고

하루종일 들판에서 쇠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지루했었는지 모른다.

 

들판에는 '혹통'이라 부르는 더러운 연못이 있는데 소 물먹는 장소였으며,

그리고 그 옆에 돌틈에는 고여있는 약간 깨끗한(?) 물은 사람이 먹었다.

 

그 물에는 '고노리'(모기 유충)와 파리떼 등 알 수 없는 곤충들이 득실 대었으나

목이 마르면 그 물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아프리카 아이들이 황토색의 더러운 물을 마시는 사진처럼

제주의 목동, 쇠테우리들도 그렇게 생명을 유지하였다.

 

 

넓은 들에 소떼를 풀어 놓으면 소들을 하루 종일 풀을 뜯고 되새김한다.

 

쇠테우리들은 높은 오름 중턱이나 언덕배기에 앉아 소들을 감시 하다보면

소 두어마리가 무리를 벗어나 다른 소떼에게 가거나 잃어 버리기도 하는데,

그러면 그 소를 찾아 들판을 헤메야 하기 때문에 감시를 소홀리 할 수도 없다.

결국 '쇠곡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것 같다.

 

1970년대 경운기가 보급되면서 소를 키우는 농가가 없어질 때까지

동네별로 쇠테우리는 오래도록 지속되어왔던 제주의 풍습이었다.

 

아마도 우리 세대가 제주의 목동, 마지막 쇠테우리 시대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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