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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재일교포의 추억(오사카 도톤보리에서)

by 나그네 길 2019. 7. 4.

서울 명동거리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장악했고,

일본 오사카 도톤보리는 한국인들로 가득 메워져 북적인다.



오사카 도톤보리 지역은 과거 물자 수송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 수로였지만

지금은 각종 음식과 쇼핑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찾는 오사카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일본인 보다 한국인이 많은 도톤보리에서는

파스와 같은 약품과 쵸콜릿 과자류 등 양손 가득 쇼핑 가방을 든 한국관광객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사진을 한 번쯤 찍는 쿠리코 러너 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해외 관광에 있어 여행 가이드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다행하게도 우리 일행의 담당 가이드 '희짱'은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관광지 등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사카는 제주 출신 재일교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태평양 전쟁 발발로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면서

당시 척박한 땅 제주에서 가난에 시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고,

해방이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오사카 지역에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60년대 중반,

우리 시대가 국민학교를 다녔던 당시에는

재일교포들이 출신 지역과 학교 등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시기였다.



지금도 시골의 마을회관이나 초등학교 교정에 가면 비석들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토지구입이나 시설 건립을 도와 준 재일교포들에 대한 공덕비이다.



내 고향 남원읍 위미리에는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기나 수도가 없었는데

재일교포들이 돈을 모아 전기와 수도공사를 하면서 겨우 문명생활이 시작될 수 있었다.



우리 집안에는 불행히도 재일교포가 없었는데,

당시 친족 재일교포가 있는 집안이 아이들은 학교에서 알아주었다.

 

재일교포가 보내준 '사지 쓰봉과 학생복'을 입고 으스대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재일교포들이 옷 보루를 보내오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학생복은 물론이고 알록달록한 원피스 여성 의류들과 양복 바지 등

중고품 옷들이 일제라는 이름으로 인기 좋게 팔려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문화 친구들이 고향에 옷 가지들을 보내는 것과 같다.   



대판의 재일교포들은 고향 마을의 학교에도 많은 기부를 하였다.


어느 중학교에는 악기들을 보내주어 관악대 밴드부를 운영하기도 했고

어느 초등학교에는 교실을 짖고 과학실험실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대판의 재일교포 집단촌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우리 제주어 사투리가 가장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기에 학술연구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고베시에서는 1995년 고베 대지진 피해지를 보존해 교육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어릴적 가난에 찌들리면서 재일교포 친족이 있는 친구를 부러워 했었는데,

이제는 오사카 도톤보리 거리를 걸어볼 수 있도록 세상은 많이 변하였다.



오래전 재일교포들은 어려운 삶에서도 고향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 주셨다. 


현재 교포 1세대들은 대부분 돌아가셨지만

우리 제주도 입장에서는 모든 재일교포들을 정중하게 대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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