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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자연

귤림추색(橘林秋色)의 유래(?)

by 나그네 길 2020. 11. 15.

제주의 가을은 아름다운 오랜지색이다.

11월에는 어디를 가도 노랗게 익은 감귤들로 늦가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래서 예부터 영주십경(瀛州十景) 중에 제주 가을의 아름다움을 귤림추색(橘林秋色)이라고 노래한 것 같다.

 

영주십경은 제주에서 경관이 특히 뛰어난 열 곳을 말한다.

영주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제주의 또 다른 표현인데,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영주십경은 제주 목사를 역임한 이익태(李益泰)가 그린 탐라십경도병풍이라고 한다.

 

그 후 제주의 많은 선비 묵객들이 개인의 감상과 취흥에 따라 여러 곳을 영주10경으로 지정하였는데,

현재 전하는 영주십경은 조선 후기 제주 향토사학자였던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1818~1881)라고 알려진다.

 

 

그런데 귤림추색에 대하여 조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제주의 가을을 감귤나무들이 수풀처럼 우거진 아름다운 황금색으로 표현할 정도였다면, 이한우가 살았던 1800년대 중반 제주섬 전역은 감귤과수원이 가득하여야 한다.

 

그러나 당시 감귤은 조선조정에서는 제주 감귤을 진상품으로 조정에서 감귤과수원을 조성하고 재배는 도민들을 노역에 동원하는 형태였다.

 

감귤과수원은 많을 때는 최고 54개소까지 조성되었는데 제주민들은 강제노동과 수탈대상이었기에 몰래 감굴나무를 베어버리기까지 했다는데, 선비들에 의하여 귤림추색으로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는 것은 이상하지 아니한가?

 

조선숙종 때 제주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 있는 귤림풍악(橘林風樂)’은 제주읍성의 망경루 후원 귤림원에서 풍악을 즐기는 내용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영주십경은 일출봉과 고수목마와 정방폭포 등 제주도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풍광으로 선정되어 있기에 관청의 과수원을 영주십경으로 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주인들은 조선조의 감귤 진상 제도가 폐지되는 1893(고종 31)까지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감귤나무를 뽑아 버리는 일까지 있을 정도로 감귤재배에 대한 기피가 이어져 왔다.

 

지금의 제주 감귤은 홍로성당의 타케 신부가 1911년 일본에서 14그루의 온주밀감을 들여와 농가에 분양해준 것이

감귤과수원이 시작이었다.

 

타케신부 온주밀감 시원지 기념비(서귀포 면형의 집, 서홍동주민자치위원회 건립)

 

그 후 1960년대 후반부터 한라산 남쪽 지역에 조성되기 시작한 감귤과수원이 이제는 제주도 전역에서 재배되면서 진정한 귤림추색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영주십경의 귤림추색

오늘날 제주도에서 감귤의 주요한 산업으로 발전될 것을 예상한 선각자들이 미리 선정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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