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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자연

용천수(湧泉水)와 봉천수(奉天水)

by 나그네 길 2022. 6. 17.

제주에서 물을 이야기할 때 흔히 등장하는 단어가 용천수와 봉천수이다.

그런데 용천수(湧泉水)는 '지하수가 지표면을 뚫고 솟아나는 물'이라고 여러 사전에 정의하고 있으나, 물이 부족한 제주민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생각했던 봉천수(奉天水)에 대해서는 간명하게 해석한 자료는 쉽게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봉천수(奉天水)를 한자의 뜻 그대로 하늘의 물, 즉 '빗물을 받아 모신 생명의 물'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서귀포 해안가 '자구리' 용천수>

제주도는 사시사철 흐르는 강이 없으므로 물이 부족한 섬이었다.

장마철 큰비가 내린다 해도 경사가 심한 지형이기에  순식간에 바다로 흘러 내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화산섬이라는 특성으로 깊은 지하 암반에 풍부한 지하수가 보관되어 있어 축복 받은 섬이기도 하다.

 

<서귀포 하논분화구의 용천수 '몰망소'>

한라산 숲속에서 땅으로 스며든 빗물은 천천히 자갈층을 통과하면서 무려 18년이 지나 암반층에서 지하수로 변하는데, 이러한 지하수가 땅 속을 흐르다 해안가에 이르렀을 때 암반 틈새로 솟아나는 샘물이 바로 용천수이다. 

 

이렇게 물이 솟아나는 해안가 용천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먹는 물의 존재 여부는 화산섬 제주민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 말해도 된다.

 

정방폭포의 원천이 되는 '정모시' 용천수

용천수가 풍부하게 솟아나면서 작은 하천을 이른 제주시 '산지천과, 서귀포 '솜반천' 은 이 물을 중심으로 가장 큰 도시가 형성되었고, 해안 절벽에서 폭포로 떨어지는 절경을 이루어 관광명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렇게 용천수는 마을을 이루는 중심점 역할을 하며 솟아나는 물의 양은 그 지역의 인구수를 결정하는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용천수가 풍부하게 솟아나는 하천이라고 해도 해안가에서 1km 정도 떨어진 지표면에서 솟아날 뿐이며, 서귀포 '돈내코'처럼 한라산 자락에서 솟아나 1km 정도 물이 흐르다 다시 땅으로 스며들어 버리는 지형적 특성으로 제주도에서는 논농사의 면적을 크게 늘려  경작하기는 어려웠다. 

  

천지연으로 흐르는 용천수 '솜반천"

이러한 작은 하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용천수는 바닷가에서 솟아나고 있다. 내 고향 마을에도 바닷가에 솟아난 '고망물'이 중요한 식수원이 되었 듯 해안가 마을은 대부분 용천수가 있어 먹는 물로 활용되었다. 

 

제주도에서 1999년에 조사한 용천수는 911개로 나타났지만, 현재 제주도내 바닷가의 용천수 대부분은 중산간 개발과 무분별한 지하수 남용으로 인해 수량이 감소하면서 용천수 자체가 사라지고 있어 문제이다.

 

<한라산 백록담은 빗물이 고인 봉천수이다.>

지하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용천수와 달리 봉천수는 빗물이 고여서 이루어진 물통이다.

한라산 백록담이나 물장오리 또는 사라오름 도 지하수가 솟아나지 않는 봉천수이다.

이러한 봉천수는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몇 년 전 백록담이 그러하였듯 가뭄이 지속되면 결국에는 말라버린다.

   

이시돌목장의 봉천수 '삼뫼소'

그러나 이러한 빗물이 고인 봉천수는 제주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성읍 등 중산간 지역에 형성된 마을들은 봉천수를 먹고 살았으며 목장의 소나 말도 물통의 고인물이 없었다면 방목하지 못했다.

 

옛말에 "말이 태어나면 탐라로 보내라"고 했던 몽골 강점기 탐라총관부에서 말 수 천필을 키울 정도의 마목장을 경영할 수 있었던 것도 목장에 빗물이 고이는 봉천수 물통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라산 봉천수 습지 '숨은물뱅듸'>

제주의 중산간 마을들은 중심부에는 땅을 깊이 파내어 빗물이 고이는  '물통'을 만들어 공동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마을 입구에는 '흙통'이라 부르는 연못을 크게 만들어 소와 말을 먹이고 목욕과 빨래도 했다. 

 

또한 초가지붕이나 큰 나무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짚을 감아 항아리에 모으는 '촘물"로 식수를 마련하였을 정도로 제주도에서 봉천수는 바로 생명이 물이라고 불러도 좋다.

 

<위미목장의 봉천수 '빌레못'>

바닷가와 내창(건천)에 있는 커다란 현무암에 빗물이 고이면서 자연적인 웅덩이가 만들어 지기도 하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봉천수에 '순물' 이나 '빌레못' 등 이름을 붙이면서 먹는 물과 생활용수로 구분해 놓고 암묵적으로 이를 지켰다.

 

내 어릴 적 오랬동안 육지에 나가 살다가 귀향한 우리 마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닷가 바위 웅덩이에 고인 봉천수의 사용처를 구분하지 못해 먹는 물인 '순물'에서 목욕을 하여 온동네에 난리가 났다. 결국 마을 원로회의에서 '다음 비가 내릴 때까지 목욕했던 물을 전부 퍼내야 한다'는 처분을 받았다. 그후 집안 식구가 모두 동원되어 이틀동안 바위 웅덩이에 있는 봉천수를 모두 퍼내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는 사실이다.

 

<서귀포 자구리 용천수에서 바라본 섭섬>

이제 제주에서는 빗물까지 아껴썼던 과거의 기억은 없는 듯 지하수를 퍼내어  '삼다수'로 먹고, '농업용수'로 쓰고, 골프장 '잔디'에 뿌리고, 관광업소에 '수영장'까지 만들면서 모든 생활용수의 95%를 오로지 지하수에만 의존하고 있다.

 

과연 우리 제주가 이렇게 물이 풍부한 섬이였던가?

현재 우리가 무심코 쓰고 있는 이 지하수는 매년 내린 빗물이 깊은 지하 암반 위에 수 천 년 동안 천천히 고이면서 만들어진 샘물이다. 즉 제주도의 선조였던 탐라인들이 봉천수로 연명하면서 아껴둔 지하수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먹는 물 봉천수는 완전 사라졌고, 용천수는 점점 말라가고, 지하수 오염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먼 훗날 우리 자손들은 무슨 물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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