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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자연

100년이 지난 두릅나무꽃

by 나그네 길 2022. 6. 3.

이른 봄 산나물의 여왕은 단연 두릅나무 순이다. 두릅은 독특한 향과 맛이 있어 오래전부터 인기가 있었다. 쌉싸름하면서도 향긋하고 아삭하게 씹히는 맛 때문에 두릅나무는 새 순을 올리자마자 꺾이는 비운을 겪는 나무이다.

 

물영아리 오름 부근에는 내가 잘 아는 두릅나무 군락지가 있었다.

10여 년 전 고사리 따러 갔다가 물영아리 서쪽 곶자왈 입구에서 그리 크지 않은 두릅나무가 50그루 이상 자생하고 있는 장소를 알게 되었으며, 그후부터는 매년 5월 초 다시 찾아가 두릅순을 적절하게 채취하며 관리했다.

 

그런데 3년 전부터는 두릅을 따지 못했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두릅을 채취하면서 새순까지 모두 따 버렸기 때문에 두릅나무가 고사되기 시작하였다.

 

올 해 다시 찾은 두릅나무 군락지에는 말라버린 고사목들만 가득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두릅나무 새순은 무차별 채취가 이루어 지면서 이제는 두릅나무를 보기 힘들정도가 되어버렸다.

또 하나의 두릅나무 군락지가 사라져가는 아쉬운 현장이었다.  

 

곶자왈에서 자라는 두릅나무는 가시가 강하고 거칠어 어린 순이 아니면 먹을 수가 없다.

금방 솟아나는 어린 순일수록 더 맛있다고 알려져 있기에 나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새 순을 모두 따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 이렇게 죽어버린 나무에 다시는 두릅순이 돋아나지 않음은 당연함에도 무차별 채취하고 있다. 

 

<사진: 산림청 생물자원관>

 

두릅은 나물로 기억되다 보니 두릅나무의 꽃이 어떻게 생겼고 열매가 어떤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100년 전 에밀 타케 신부가 채집했던 식물채집본 중에서 두릅나무꽃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에밀 타케 신부의 두릅나무꽃 채집본을 보면서 새삼 감탄했었다. 

100년 전 먹을 거리가 없었을 때에도 두릅나무는 봄에 두릅순이라는 나물을 먹거리로 제공하였지만, 이렇게 꽃이 드문 여름에 우산 모양의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적당하게 두릅순을 채집하였던것 같았다.

 

<사진 : 국립수목원>

최근 두릅나무는 점점 찾아보기 힘들고 꽃과 열매에 만났던 기억은 너무 오래되었다.

그나마 인터넷 온라인 검색을 통하여 자료를 찾아볼 수 있음은 감사한 일이다. 

 

두릅나무의 여린 순은 하얀 꽃 뭉치가 되었다가 가을이 되면 까만 열매로 익으면서 다시 한번 변신하고, 푸르렀던 잎파리는 노란 단풍이 되었다가 앙상한 가시만 남게 되면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사진 : 옥매화 카페>

이제 드릅나무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어쩌다가 인간이 두릅순을 먹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제주의 산하에서 두릅을 쉽게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조 말, 서귀포 홍로성당에서 선교하였던 에밀 타케 신부는 식물콜렉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08년 8월 17일 한라산에서 두릅나무꽃을 채집했는데, 당시 채집본을 보면 1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꽃술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에밀 타케가 제주에서 채집한 식물은 세계 여러 나라 식물원에 7,047점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7천점 이상이라는 이 채집본 수량에 대한 감이 잡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제주도에 관속식물 전체가 2,200종 정도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얼마나 많은 식물을 채집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에밀 타케는 제주도에 사는 관속식물 전체보다 3배 이상 많은 식물을 채집하면서 식물종의 다양함을 알려 주었다.

 

<영국 에든버러식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에밀 타케의 두릅꽃 채집본을 서울대학교 산림공학부에 전시하고 있다.>

강열한 가시로 온몸을 감싸며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두릅나무에서 마음대로 새순을 채취할 수 있는 자는 인간이 유일하다. 오래전에 나만이 알고 있었던 두릅나무 군락지가 몇 년 전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두릅나무가 고사하는데까지 걸린 기간은 고작 3년이었다. 

 

100년전 두릅나무꽃을 채집하여 생물종 다양성을 알려주었던 에밀 타케 신부에 비하여, 현대를 사는 우리는 오로지 먹기위하여 두릅순을 채취하면서 식물의 생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두릅나무를 고사시켜 버리는 것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버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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