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기도'(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St. Francis of Assisi>
Prayer For Peace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어느 날 저녁 프란치스코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가 보았더니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치스코에게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달라고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를 녹여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프란치스코가 일어나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왔다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기도가 바로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가톨릭 수도원의 역사를 훑다보면 두 개의 거대한 봉우리를 만난다.
하나는 ‘성 베네딕도(480~547)’이고, 또 하나는 ‘성 프란치스코(1182~1226)’다.
베네딕도는 서양 수도원에 주춧돌을 놓았고, 프란치스코는 무소유의 삶으로 수도원에 영적 나침반을 제시했다.
특히 성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역사를 통틀어 신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프란치스코’란 이름 하나만으로 세계적인 순례지이자, 여행지가 됐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정교(政敎)유착의 특권을 향유하며 총체적으로 탈복음적인 궤적을 그리고 있을 때,
1207년 청년 프란치스코는 허물어져가던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밑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 교회를 다시 지어라"
그는 이를 곧이곧대로 알아들어 맨손으로 흙과 돌을 들어 나르며 성당을 보수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몰락 위기에 처한 중세 교회를 위한 ‘세기적’ 명령이었다.
이를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탁발 수도회를 창설하여 위대한 개혁의 첫걸음을 내디딘다.
그가 표방한 것은 복음으로 돌아가 청빈, 겸손, 소박의 삶을 몸소 사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교회가 심각하게 앓고 있던 세 가지 병폐인 부, 권력, 사치에 대한 명처방이었다.
그 파급력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힘으로 밀어붙인 무력 혁명도 아니요, 센세이셔널한 사상으로 새 시대를 연 이데올로기 혁명도 아닌,
그저 소박한 실천운동이었지만 세기를 거듭할수록 파장은 기하급수적으로 거세어져 갔다.
성 프란치스코는 ‘개혁’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고
교회의 모든 스펙트럼을 아우르면서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쇄신의 단초를 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료 형제들을 동지로 얻었고, 숱한 추종자들을 협력자로 얻었다.
‘제2의 예수’라 불렸을 만큼 존경 받는 성 프란치스코가 일으킨 운동의 여운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증폭되면서 중세 가톨릭을 제자리로 돌려 놓게 되었다.
아시시의 성 다미아노 성당에는
프란체스코의 영적인 동반자였던 클라라 수녀의 유해가 있다.
성녀 클라라는 아시시의 귀족 집안 출신이지만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모든 것을 버리고 프란치스코를 따랐다.
11살 아래였던 클라라 수녀는 프란치스코에겐 친구이자, 누이이자, 함께 영성의 길을 가는 동반자이기도 했다.
성당 안의 조그만 정원에는 장미가 있다.
그러나 그 장미에는 아무리 봐도 가시는 보이지 않는다.
“젊었을 때 프란치스코 성인에게도 욕정이 일어났다.
그걸 이겨내기 위해 그는 이 근처에 있는 장미덩굴 위에서 자신의 몸을 굴렸다.
가시가 몸에 찔리고, 피를 흘리고, 고통을 통해 그는 욕정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계속 장미 가시 위에서 뒹굴자 하느님이 감동하여 장미의 가시를 없앴다."고 한다.
이 일화는 대단히 인간적이다.
가톨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사랑받고 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치스코도
욕망 앞에서 고민하고, 싸우고, 좌절하고, 다시 싸우고 하는 과정을 거듭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길은
우리에게 ‘나도 당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길은 당신도 걸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짐승과 새들과도 말을 나눌 수 있었다는 청빈의 상징 성 프란치스코,
무소유의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던
그의 수도회는 중세 신분사회를 크게 흔들어 놓기도 했다.
프란치스코는 44세에 숨을 거두었다.
죽기 2년 전에 그는 동굴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몸에 오상(五傷)이 나타났다고 한다.
오상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몸에 난 다섯 상처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으로 찔렀던 옆구리의 상처를 말한다.
새로 선출된 제266대 교황 성하께서 즉위명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하셨다. 그래서인지 새삼스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하여 묵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이다.
지난 2010년 가을,
메주고리예 성지순례 중에 찾았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리며 이 포스팅을 올린다.
< 이 포스팅을 활용하실 분은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이 포스팅을 무단사용하고 있어 원본이 훼손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성당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절(성토요일, 부활대축일) (0) | 2013.03.31 |
---|---|
성삼일 전례- 성목요일, 성금요일 예식 (0) | 2013.03.30 |
교황선출 콘클라베란? (0) | 2013.03.14 |
부엌의 기도 (0) | 2013.03.13 |
교황의 마지막 알현 (0) | 2013.03.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