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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태풍 나크리, 제주 상륙 중!!!

by 나그네 길 2014. 8. 2.

 제12호 태풍 나크리가 제주에 상륙하였다.

지금 이 시간 강한 바람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려 교통신호등이 부러지는 등 피해도 발생하고 있다.

 

이번 태풍은 이동 속도가 느려

하루 종일 제주에 머무르면서 많은 비를 뿌리고 저녁 때쯤 빠져나갈 것으로 예보하고 있는가운데

감귤하우스 등 농가에서는 피해 예방을 위한 걱정이 많은것 같다.

 

 

예부터 제주는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태풍의 진로상에 위치하고 있어

가장 먼저 태풍과 맞서게 되며 많은 피해를 입어왔다.

 

그렇기에 제주인들은 평소에도 바람에 대한 대비를 잘하고 있어

그런대로 잘 견디어오고 있는편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예부터 거센바람에 대비하여 초가집처럼 단단하게 집줄을 매었고

지형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완만하 경사를 이루어 많은 비가 내려도 금새 바다로 흘러가버리며,

최근에는 방풍림까지 잘 조성되어 있어 태풍에도 산사태가 없는 유일한 지역이다.

 

 

제주 사람들은 태풍이라고 하면 '사라호 태풍'을 기억한다.

1959년 추석날 몰아닥친 사라호 태풍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사라호 태풍은 1959. 9. 16~9.18

우리나라 전역을 강타하여 사망 및 실종자는 약 850,

부상자는 약 2500명을 만든 강력 태풍으로 역대 가장 많은 피해를 남겼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사라호 태풍의 그 무섭던 비바람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1959년 9월 16일 그날은 추석 전날 맹질떡하는 날이었다.

당시에는 전기와 수도는 물론이고 라디오조차도 없는 암흑의 시기여서

태풍이 오고 가는지 태풍이 이름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단지 2~3일 전부터 바다가 울렁거리고 바람이 이상하면 태풍을 느끼는 때였는데,

아침부터 바람이 불어 추석맹질을 먹지 못할까 걱정하면서 맹질떡 하는 것을 보았는데,

태풍이 온다고 하여도 맹질떡과 적갈을 다 준비를 했던것 같다.

 

 

그날 저녁부터 게센 바람과 함께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이 깊어갈 수록 태풍이 심하게 몰아쳐 바람소리와 빗소리 나무들이 우짖는 소리

그리고 초가지붕이 덜컹이면서 흔들리고 비가 방문 창호지를 뚫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멍석을 가져다가 문에 대고 못을 박아 비바람을 막았고,

어른들은 쇠압배(마차에 짐을 묶는 줄)로 초가 지붕이 날라가지 않도록 동여 매였다.

 

 

당시 우리집은 초가집이 세채(안집, 밖그레, 쇠막)로 우리는 밖그레에 살았는데

쇠막집(소가 있는 창고) 초가지붕이 날라갈 것 같아 쇠압배로 묶어 땅에 말뚝을 밖았다.

 

지붕에서 탐스럽게 열려있던 호박들은 모두 바람에 날라갔으며,

어느 집에서 떨어져 나온 문짝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도 보았다.

 

쇠와 도새기(돼지)들도 무서웠는지 밤새 음~메,괙~괙 울어 대었고 

나는 무서워 오돌거리며 빗물이 들이친 방구석에서 앉아

무서운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한 밤을 꼬박 새었다.

 

  

 

다음날 추석 아침이 되자 바람은 어느정도 약해진것 같았으나

비는 더 거세어 지면서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추석에는 친족들이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함께 제사를 지내는데

이날 추석은 비바람속에서 각자 제사를 지내고 오후가 되어

바람이 지나가 종손 할아버지가 있는 우리집에 모여 추석 차례를 지냈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우리집 초가집은 멀쩡히 살아남았는데,

동네에서 집이 제대로 살아남은 가구가 몇 안되었고

누가 어디서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으며

수확기를 앞둔 고구마와 조밭과 모밀밭이 피해로 그 해 겨울은 흉년이 들었다.

 

 

사라호가 엄습한 그 날,

916일 밤부터 17일 아침까지 12시간 동안 제주는 공포와 죽음의 섬으로 변했다.

 

폭풍우를 동반한 태풍은 산더미 같은 파도와 해일로 도내 모든 항구와 포구를 휩쓸었고

하천을 범람시켜 마을과 거리를 물바다로 만들었으며 교통마저 두절시켜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공포에 떠는 아우성만이 가득했다.

 

추석 차례를 준비하던 농민들은 

하늘이 내린 대재앙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1959년 태풍의 이동 진로도>

 

당시 제주도에서는 집계한 피해를 보면

사라호 태풍으로 인해 사망·실종자 11,

부상자 127명 등 모두 14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였고

 

당시 화폐가치로 325000만환의 재산피해가 났으며,

당장 의식주 해결이 곤란해 구호해야 할 이재민수만도 3342세대에 12860명이었다.

 

또 가옥 14271동이 전파·반파·침수되고 선박 334척이 파괴되거나 유실·침몰됐으며

공공건물 파손 131, 교량 유실 21개소, 도로 유실 15, 상수도 및 수리시설 11개소,

교실기관 289, 사찰 및 교회 건물 102동이 피해를 당했다.

 

 

<사라호 태풍, 이승만 대통령 피해지역 시찰>

 

당시 나는 어린시절이었기에

사라호 태풍으로 무슨 피해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해 겨울은 흉년이 들어 먹을 게 없었는데

사라호 태풍으로 농작물이 다 죽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은 기억하고 있다. 

 

 

<사라호 당시 이동 진료소>

 

좁쌀에 감저(고구마)를 썰어 넣은 조팝 범벅과 삶은 감저를 주식으로

그 다음 해 6월 살오리(보리)수확기까지 수개월여를 배고픔으로 견디어 내면서

 

바닷가에 가서 메역과 고매기와 구쟁기(소라), 조개(오분작)을 잡아먹었고

겨울에는 생이(참새)를 잡기도 하면서도 큰 탈없이 자랐으니 참 신기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우리가 먹었던 것들이 최고의 자연 건강 영양식이었지만

영양에 불균형이 있었던 것 만큼은 틀림이 없는데,

그래도 내 키가 178cm로 우리 세대에는 큰 편에 속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강한 바람과 많은 비를 포함한 태풍은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늘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태풍은 중요한 수자원의 공급원으로 물부족 현상을 해소한다

또한 태풍은 저위도 지방에서 축적된 대기중의 에너지를

고위도 지방으로 운반하여 지구상의 남북의 온도 균형을 유지시켜 주고,

 

해수를 뒤섞어 순환시킴으로써 플랑크톤을 용승 분해시키고

바다밑 돌과 모래들을 움직여 바다 생태계를 활성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대기의 난폭자인 태풍은

동시에 유용한 면도 지니고 있는 매우 중요한 대기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태풍 너크리는 사라호 등 다른 태풍에 비하여 바람은 그리 거세지 않은데,

비는 더 많이 내리는것 같아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태풍 너크리로 인한 피해가 없기를 기원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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