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자연과 예술문화,
그리고 제주인들의 삶을 다루는 계간지 '컬쳐제주(Culture JEJU)'가 창간되었다.
'평화와 사랑'이라는 주제로 제작된 이번 창간호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에 따른 특별기획 기사를 내었는데,
복자품에 오른 제주 최초의 신자 김기량 펠릭스베드로 기획기사와 함께
나의 졸필 '김기량길 순례기'가 게재되어 제주도의 순례길을 소개하는 계기가되였다.
컬쳐제주를 창간한 안창흡 제주시사대표는
"제주의 자연과 문화예술, 그리고 삶 이야기를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이 되고자 한다"며
"공감과 소통, 약자를 배려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통합과 평화의 확산에 힘써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번 창간호에는 명예발행인으로 위촉된 강요배 화백과 문화예술인 강영은 시인의 인터뷰
박몽구 시인의 축시, 채기선 작가의 축화를 비롯해 변시지 화백이야기가 눈길을 끌고 있으며,
2014제주국제실험예술제 예술감독인 김백기를 다룬 'Now&Here'도 읽어봄 직 하다.
<이하 제주컬쳐에 게재된 순례기>
‘영광의 길 – 김기량 길’ 순례기
올 여름 8월에는 1년 만에 세상을 바꾼 사람이 우리나라에 온다. 어렵고 힘든 이웃과 함께 가장 낮은 자세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종교와 종파를 떠나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8월 14일부터 5일간 방한하여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우리나라 천주교 전례 초기에 희생되었던 순교자 124위를 복자(福者) 품으로 올리는 시복식을 거행하고 대전에서 개최되는 아시아청년대회(AYD)에도 참석하게 된다.
천주교회에서 복자(福者, beatus)는 신앙의 모범이 되는 이에게 주는 존칭으로 어느 국가나 지역에서 공경의 대상이 되는‘준성인(準聖人)을 말하는데, 이번에 복자품에 오르는 시복자 124위중에는 우리 제주 출신 순교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金耆良, Felix Petrus)가 있다.
김기량은 제주 출신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이 고장에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한‘제주 지역의 첫 순교자’로 참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제주에서 유일하게 복자품에 오른 사람이다.
이와 관련 천주교 제주교구 순례길위원회에서는 지난 6월 21일 교황 방한과 시복식에 맞추어 조성한‘김기량 길 선포식’을 개최하였으며, 이 길을 이번에 시복된 복자 김기량에게 앞으로 성인품에 오르는 더 큰 영광이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로‘영광의 길’이라고 명명하였다.
김기량 길은 조천성당에서 시작하여 연북정과 관곶 및 서우봉 해변을 지나 김기량 순교 현양비까지 9.3km의 아름다운 순례길이다. 그리고 이 길은 제주의 자연과 주민들의 삶을 둘러보면서 복자 김기량의 순교정신을 묵상해 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장마가 시작된다는 6월 하순 어느 날, 간간이 빗방울이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제주교구 순례길 해설사들은 김기량 길을 순례하기 위하여 조천성당을 찾았다. 자그마한 언덕 위에 위치한 조천성당 입구에는 최근에 개장한 김기량 순례길 표지석이 자리 잡아 말없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다행히 내리던 비가 그치면서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 순례길을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순례길 표지석 앞에서‘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로 순례를 시작하였다. 노란색 순례길 표시를 따라 마을 안길을 이리 저리 걸어가다 보면 조천포구 입구에서 연북정의 높은 돌 성곽과 날렵한 기와지붕을 만날 수 있다.
연북정(戀北亭)은 유배 온 선비들이 한양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기린 정자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북정이 처음 세워진 것은 고려말 공민왕 23년(1374)으로 당시에는 조천진성 밖에 있어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조선 선조 32년(1599) 제주목사가 이 자리에 건물을 중수하고 연북정이라고 개칭하였다.
연북정에 올라 보면 눈앞에 조천포구가 펼쳐지는데 제주항이 개발되기 이전 조선시대에는 육지부와의 해상교통은 조천포구를 이용했으므로, 복자 김기량도 홍콩에서 세례를 받은 후 귀향할 때에 이 조천포구로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 순례자들은 임금이 자신을 불러주기를 고대하는 유배자들이 사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연북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복자 김기량을 보내어 이 땅에 신앙의 씨를 뿌린 선구자로 만들어 주신 오묘한 신비를 생각하며 묵상하게 된다.
『김기량은 1816년 제주목 김녕리의 비교적 윤택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이가 들어 배를 구입하여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김선달(金先達)로 불리기도 했는데, 42세가 되던 1857년 2월 동료 4명과 함께 배에 물건을 싣고 모슬포 방면으로 항해하다가 사나운 폭풍을 만나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폭풍으로 동료를 모두 잃고 한 달 가까이 바다에 떠다니면서 혼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던 김기량은 중국 광동 해역에서 지나가는 영국 상선에 의해 구조되었으며,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로 이송된 후 치료를 받으며 머무르게 된다.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에는 당시 조선인 신학생이 휴양 차 머무르고 있었는데 김기량은 이 신학생에게 80여일 동안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1857년 5월에 영광과 반석을 뜻하는 펠릭스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프랑스 루세이 신부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제주 출신의 첫 번째 신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우리 순례자들이 김기량의 표류와 구조 그리고 세례과정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면서 신흥리 해안도로를 걸어가다 보면 제주에서 육지와 가장 가깝다는 관곶을 만나게 된다. 제주올레 19코스와 겹치는 여기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망대에 올라 저 멀리 육지가 보일까 기대하며 검푸르게 빛나는 바다를 둘러보게 된다.
관곶(官串)은 옛날 조천관 시대에 생겨난 지명으로 조천 포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곶(串)이란 뜻에서 유래되고 있다. 제주도에서 해남 땅 끝 마을과 가장 가까운 약 83km 정도 거리에 있다. 관곶은 독사머리처럼 불쑥 솟아나 있는 모양으로 "제주의 울돌목"이라 불리며, 지나가던 배도 뒤집어질 정도로 파도가 거센 곳이기도 하다. 순례자들은 여기에서 폭풍으로 중국까지 표류하였던 김기량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복자 김기량은 홍콩에서 세례를 받은 후, 1858년 1월 의주를 통해 귀국하여 최양업 신부를 만난다. 그리고 교우촌에서 3개월가량 머물다가 해상에서 표류 된지 1년 2개월만인 1858년 4월 조천포구를 통해 귀향하여 함덕리 고향땅을 밟을 수 있었다.
제주에 도착한 그는 꾸준히 복음을 전파하여 집안 식구를 중심으로 20여명을 입교 시킬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배에서 일하는 선원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치는 등 부단히 노력한 결과 1866년 무렵에는 복음의 불모지에서 40여명을 천주교로 입교시키며 복음화를 실천하는 성실한 신앙생활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에도 김기량은 1865년 다시 한 번 폭풍을 만나 일본 큐우슈우 해안에 표류한 적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그는 일본 나카사키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그의 도움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렇게 김기량이 바다에서 표류를 당할 때 마다 두 번이나 천주교와 인연을 맺도록 도와주신 것은 이 땅에 천주교의 씨앗을 심으려는 신비로움이 아닐 수 없다.』
이러 저런 생각에 잠기며 김기량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어촌마을 신흥리에 도착하는데, 거기에서 아직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오래된 해녀 불턱을 볼 수 있다. 불턱은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쬐며 몸을 녹이는 장소를 말한다. 보통은 돌을 이용하여 원형으로 담을 쌓고 가운데에는 불을 필 수 있게 만들어 놓는데, 해녀들에게 불턱은 휴식과 함께 소통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아름다운 신흥리 바다에는 마을주민들이 액운을 막으려고 쌓아놓은 방사탑 두 개가 나란히 물속에 서있다. 풍수지리상 신흥리는 바다 쪽이 허하기 때문에 돌로 탑을 쌓아 약한 기운을 보완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옛 제주 사람들이 바다와 함께하는 생활상을 떠 올리면서 순례길의 멋을 더해주고 있다.
해안도로를 돌아서면 멀리 서우봉이 부드러운 자태가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순례자들이 서우봉을 바라보며 가벼이 걷다 보면 썰물에 들어난 원담을 만날 수 있다. 예전에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돌로 반원형의 담을 쌓았는데 이를 원담이라고 부른다. 이 원담은 밀물에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돌담에 막혀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시설로 옛 사람들이 현명함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순례자들은 복자 김기량의 고향 조천읍 함덕리에 들어서게 된다. 누군가 말했듯이 함덕은 리 단위 마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서우봉 해변의 고운 백사장 풍경은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서우봉 해변을 앞두고 지금도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함덕포구에는 낡은 배들이 몇 척 보인다. 김기량이 무역에 종사하던 선주 시절에 바로 이 포구를 이용했을 것을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신앙의 불모지에 당시 조선 조정에서 금지하고 있는 천주교를 이 땅에 전파하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던 순교자를 떠 올리게 된다.
함덕해수욕장의 모래 위에 서면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에 감사하게 만든다. 단순한 미적 감각을 넘어선 옥빛 바다와 잔잔하게 넘나드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순례자들은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과 하얀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순례길의 피로를 시원하게 날려 버릴 수 있다.
김기량 길의 종착지는 마을 안길을 지나 함덕중학교 옆에 있는 김기량 순교 현양비이다. 그곳에는 순교 현양비와 순례길 표지석이 있으며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문이 대리석판에 새겨져 있다.
『복자 김기량은 병인박해가 한창일 무렵인 1866년 9월 예비신자들을 데리고 육지로 나갔다가 통영에서 다른 교우 4명과 함께 체포된다.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포졸들에게 심하게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밝혔으며, 여러 차례 회유와 협박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김기량은 1867년 1월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관헌들은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을 염려하여 가슴에 대못을 박기까지 했다. 이렇게 제주 출신 최초의 세례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그의 나이 51세 때에 장렬하게 순교함으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천주교 제주교구에서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시복시성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순교 현양비를 세웠고 자료집 발간과 순교자의 이름을 딴‘펠릭스합창단’창단하였다. 그리고 신설 본당명을‘김기량성당’으로 지었으며 현양대회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제주교구 순례길위원회에서 조성한 순례길은 6개 코스가 있다. 그 중에서 이번에 개장한 김기량 길(영광의 길)과 용수성지를 지나는 김대건 길(빛의 길), 그리고 서귀포의 사적지 하논성당 길(환희의 길)은 이미 개장하였으며, 나머지 3개 코스인 황사평 길, 이시돌 길, 정난주 길은 매년 순차적으로 개장할 계획이다.
제주에는 아름다운 길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김기량 순례길처럼 제주의 역사와 서민들의 문화, 그리고 순교자의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진 길은 흔치 않다.
오늘 우리는 이‘영광의 길’을 걸으면서 복자 김기량의 생애와 순교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땅 제주의 첫 순교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주시기를 기원하면서 우리의 순례가 지속될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 끝
나의 김기량길순례기는
컬쳐제주에서 제주교구순례길위원회(위원장 현문권신부)에 원고청탁이 있어
어줍지않은 글이나마 천주교순례길을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순례길위원회와 제주컬쳐에 감사를 드리면서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순례길 여행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유배길, 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을 따라서, (0) | 2014.10.05 |
---|---|
길위에 인문학 - 추사 김정희 유배길을 가다. (0) | 2014.09.22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세리성당 (0) | 2014.09.12 |
비밀교우촌 배티성지 (0) | 2014.09.02 |
황새바위 (0) | 2014.08.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