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유배의 땅이다.
고려와 조선조를 거치는 동안 2~300여명이 제주에 유배를 왔으며,
그 들은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유배자들은 제주의 풍토에 어울려 살기 힘이 들었으나,
이 땅 제주의 역사는 유배자들로 인하여 풍요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제주의 유배자들 중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가 추사 김정희와 조선조 최고의 학자 우암 송시열을 비롯해
최근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광해군과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 면암 최익현,
그리고 제주 최초의 천주교인 정난주 마리아 등
임금에서부터 여인까지 남녀노소가 모두 유배를 왔었다.
이 유배자들은 우암 송시열처럼 3개월을 머무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난주 마리아처럼 38년을 살면서 천수를 다한 사람이 있고
광해군처럼 쓸쓸히 살다가 병사한 유배자도 있다.
그러나 조선조 평균수명이 46세임에 비하여
유배자들은 비교적 장수를 누렸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제주의 자연적인 음식과 욕심이 없는 삶과 함께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일에 정열을 쏟아서 장수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
육지부 흑산도에는 유배자가 겨우 13명뿐이었다고 하는데
이 땅 제주에는 왜 그렇게 많은 300여명이 유배자가 있었을까?
유배지를 결정할 때에도 적당한 조건이 있어야 했는데
그 첫째가 관청이 있어 유배자를 관리할 수가 있어야하며
다음은 그 땅에서 유배자를 먹여 살릴 수 있는냐가 중요한 관건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조건에 제주가 부합되었는지 제주에 가장 많은 유배자가 오게 되었던것이다.
최근 다시 인문학 바람이 불고 있는데 발 맞추어
서귀포 삼매봉도서관(담당 오명심)에서
"길 위의 인문학 - 제주 유배지 문학기행" 프로그램이 있었다.
오늘은 그 첫째 날, 우리는 추사 김정희 유배길을 함께 걸었다.
오전에는 제주도 유배문학의 대가이신 양진건 제주대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추사 김정희가 살았던 초가집 마루에 앉아 시작하는 유배문학 강의는
왜 우리에게 인문학자가 필요한지를 생각케하는 명강의였다.
내가 제주에서 낳고 자라면서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유배문학
나는 오늘 유배자들이 이루어낸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보면서 커다란 감동을 맛보았다.
조선초기만 하더라도 제주의 인구는 겨우 2만여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종조에 제주사람들에 대한 출육금지령을 내렸는데
그 명령으로 조선중기에는 인구가 8만여명으로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유배자들은 제주에 정착하거나 혼인을 하면서 제주의 성씨를 다양하게 만들었으며,
오늘날 제주 정착 집안에는 입도조와 입도 00대라는 특유한 호적이 존재하고 있다.
나의 집안 군위 오씨만하여도
조선 세조때 단종폐위에 반대하다가 유배온 통정대부 오석현 입도조가 있다.
추사 김정희는 55세때 유배를 와서 8년 3개월간 제주의 대정지방에 머물렀다.
유배기간 동안 추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유명한 세한도를 그려 제자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추사는 유배중에 제주사람을 제자로 뽑아 가르치는 등
자신만의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을 실천하면서 유배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아래는 세한도의 집을 본떠서 지은 추사관(박물관)>
그러나 추사도 사람인지라
부인에게는 한글 편지를 써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투정하는 등
지극히 인간적인 면을 보이는 편지들이 추사관에 진열되어 있으며
부인은 젖갈류는 물론 소금에 절인 생선과 인절미까지 만들어 보내 주었다고 하니
그 부인의 사랑 역시 지극하기만 하다.
그러나 추사는 집념의 선비이다.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배기간동안 벼루 10개에 밑장을 내었으며
붓 천자루가 몽당붓이되었다고 하면서 추사체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양진건 교수는 제주인이 해외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두가지가 있는데,
유배자들을 만나거나
또는 바다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는 경우뿐이라고 하면서,
제주사람으로 복자품에 오른 최초의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오후에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추사 유배길을 걷는 프로그램이다.
추사 유배길은 3개의 코스가 있으나
오늘은 추사관에서 단산을 거쳐 대정향교까지 8.6km를 걷는 집념의 길(1코스) 였다.
정난주 마리아의 묘(대정성지)는 거리가 멀어 생략하였으므로
이 행사를 끝내고 개별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대정지역의 돌 하르방은 작고 아담하게 생긴 특징이 있다>
<추사가 평소 걸어다녔던 길, 단산 농로길이 아름답다.>
<단산과 방사탑, 이 지역은 오름이 많아 지기가 강한 지대이므로 방사탑을 쌓았다고 알려져 있다.>
추사가 차를 마시때 쓰는 물을 길어 갔다는 세미물은
지금도 졸졸 흐르며 샘물이 솟아나고있어 지난 세월을 느끼게 한다.
드디어 오늘의 종착지 대정향교에 도착하였다.
대정항교는 제주의 3개 밖에 없는 제주 서부지역의 유일한 향교로 명성을 떨쳤기에
아마 추사도 이 향교를 찾아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대정향교는 아직도 춘계와 추계 석전대제를 지내고 있다.
대정향교에서는 심리학을 전공한 여자 스토리텔링 작가분이
추사길을 걸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색다르게 표현하는 프로를 진행해 주셨다.
돌아오는 길에 대정성지라고 불리는 정난주 마리아 묘소를 순례하였다.
정난주 마리아는 신유박해때인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남편 황사영은 사형을 당하고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관비로 제주에 유배를 당했다.
정난주 마리아는 38년동안 관비로 지내면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이웃에 모범을 보였으므로
대정사람들은 정난주 마리아를 존경하면서 '서울 할머니"로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분이 돌아가시자 무덤을 만들어 자손대대로 벌초를 해오다가
천주교제주교구에서 그 묘역을 성지로 조성하게되었다.
이 유배길에서 우리는 추사 김정희를 만날 수 있었으며
추사에게 우리가 닮고 싶은 것 하나씩을 말하면서 이루어 지기를 소망했다.
그러한 소망들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이렇게 유배문학 기행 1일차 프로그램을 마쳤다.
제주인은 누구도 유배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나도 600년전 단종폐위에 반대했던 나주영장 통정대부 오석현 입도조께서 유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오늘 날 제주에서 다섯째 정도 가는 '군위 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출육금지령과 유배문화때문에
제주인은 배타성이 강하여 육지에서 온 사람들을 잘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예전에 '할아버지' 무덤이 제주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른지방 사람들에게는 배타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제주에 살고 있으며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과
제주에서 태어나 육지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제주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제주인 모두는 유배자들과 함께 했던 조상들이 자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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