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공도서관들이 달라지는것 같다.
예전에는 가만히 앉아서 책을 빌려주거나 독서방을 운영하던 도서관들이
최근에는 적극적으로 길위로 나와 주민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
삼매봉도서관(담당 오명심)에서 운영하는
'길위의 인문학'- '제주유배지를 찾아 떠나는 문학기행'도 그런 프로그램이다.
오늘은 제주유배길 두 번째 날,
조선시대의 마지막 선비라고 부르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배길을 함께 하였다.
면암 선생은 조선조 최고의 권력가였던 대원군과 대결하다가 유배를 왔었는데
여기 제주도에서 1년 5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살아갔던 발자국을 찾아보는 시간이되었다.
제주시 연미마을에서 시작되는 면암 최익현의 유배길은
조설대와 정실마을을 거쳐 영주10경의 방선문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배문학으로 유명한 제주대학교 양진건 교수의 인문학 강의는
이 시대에 왜 유배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지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양진건 교수는 10.14일 KBS제주 방송의 출연 초대를 받아
제주의 유배문화에 대하여 생방송으로 강연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최근 인문학의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경제가 발달한다고 하여도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지 않고는
우리들이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영해 주고 있는것 같다.
조선시대 마지막 선비 최익현은 43세가 되던해
1873년 12월 4일, 오늘처럼 스산한 바람이 부는 조천포구를 통하여 제주에 유배왔는데
17개월후에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또 상소문을 올려 다시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그 후 고향에 낙향하여 20여년간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다가 붙잡혀 대마도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면암 최익현의 시신이 대마도에서 운구되어 들어오던 날,
부산항에는 조선 팔도에서 모인 선비들이 하얀두루마기로 온톤 하얗게 변해버렸다고 한다.
공자와 주자로부터 내려온 우리나라 주자학은
조선 중기인 16세기 이황과 율곡에 의하여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17세기에 송시열로 이어졌으며, 다시 18세기에 이항로가 전해 받았다가
19세기에 조선이 마지막 선비 최익현으로 유생의 뿌리가 내려 왔다고 한다.
이러한 대학자 중에서 제주에 유배를 왔던 사람은
송시열과 이익 그리고 김정희와 김윤식, 이승훈 등 당시 최고의 거장들이 제주에 머물게 되었다.
제주의 입장에서는 유배가 아니었으면 이런 학자들을 만날 수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제주는 유배자들로 인하여 풍요롭게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에서 유배자들에 대한 관심은 너무 부족하였다.
유배지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장소는 거이 없으며
도로와 건물 신축 등으로 유배자들이 머물렀던 서당과 집터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신제주 제주경찰청 옆에 최익현이 자주 찾았던 칠봉서당터도
도로 한가운데 교통섬으로 남아 있을 뿐, 순례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최익현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운명한 이후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제주에서도 최익현과 교류했던 제자들에 의해 비밀결사가 생겨났으며
"조선의 치욕을 설원한다"는 뜻을 비석에 새겨 모임을 가졌던 장소
'조설대'는 그대로 남아있으니 다행이다.
조선시대는 수구파와 개혁파의 대립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4대사화로 대부분 수구파들이 집권을 하였으며
개혁파들은 낙향하여 서원을 만들고 후진양성에 공을 들였다.
최익현도 제주에서 많은 유생들과 교류를 하면서
글과 편지 등을 통하여 유배의 흔적을 많이 남겼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고 한다.
그 하루를 지나면 종전의 나와 다른 인생이 되거나
또는 그 결정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넘어가 버리는 것도 있다.
유배자들의 결정적인 하루는 바로 유배를 선고 받을 때이며
그 유배를 받아들여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 완성과 같은 계기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유배길은
아름다운 메밀밭을 지나면서 가을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인문학과 제주의 유배문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할 수있게 만들어준
삼매봉도서관과 문학기행을 기안한 오명심 주사(아래 사진)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면암은 유배에서 풀려 자유의 몸이 되어도 바로 돌아가지 안하고 한라산을 오른다.
당시 제주사람들은 한라산을 신성시하여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거이 없었는데
최익현은 제자 10여명과 함께 방선문을 거쳐 지금의 관음사 코스를 이용하여
영실코스로 하산하는 2박3일간 등반하고 '유한라산기'를 남긴다.
유배자들 중에는 한라산을 오르고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남강 이승훈의 '한라산 기행'이 대표적이다.
유배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방선문에 도착하였다.
방선문은 예부터 영주10경의 '영구춘화'로 더 잘알려져 있는 명소로
방선문 계곡에 앉아서 봄에 핀 철쭉을 감상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래서 '신선이 방문하는 문'이라는 뜻의
큰 바위문이 위치하고 있어 아직도 예전의 풍광을 느껴볼 수 있기도 하다.
방선문 계곡에는 절벽에 이름을 새겨 놓은 '마애'가 50여개 있다.
그 중에 최익현의 마애도 볼 수 있는데
마애는 대부분은 목사와 장령들이 방문하여 새겨 놓은 것으로
이 또한 제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쳤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경치가 좋은 곳 마다 이름을 써 놓다던지
아니면 '주 예수를 믿으라'는 낙서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옛날에는 이렇게 돌에 이름을 새기는 것이 보통 풍습이었던것 같다.
메밀꽃 필 무렵(이효석)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리의 밤 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븟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유배인들은 제주에서 자기 회복과 자기의 충전이 있었기에
이 유배를 통하여 자기의 완성에 더 가까워졌으며,
제주인들은 유배자들을 통하여 한층 더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다.
오늘 유배길 순례를 마치면서
최근 유배인들이 껶었던 것과 같은 내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하루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나에게 전혀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유배길을 걸었다.
옛날 '출육금지령'으로 외로운 고도였던 제주도와 달리
오늘날에는 연예인 이효리를 비롯하여 많은 이주민들이 제주에 들어 오고 있다.
우스개 소리로 이 분들을 자발적 유배인들이라고도 말하는데
제주는 이 자발적 유배인들로 인하여 다시 한번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제주로 이주하는 모든 분들에게 평화가 함께 하시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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