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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제주의 모듬벌초

by 나그네 길 2015. 9. 16.

제주에는 다른 지방에 없는 특이한 풍습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모듬벌초'와 '신구간'은 제주에만 있는 대표적인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제주의 '신구간'은 겨울철에 있다.

 

신구간은 24절기 대한(大寒)후 5일부터 입춘(入春)전 3일까지 약 일주일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은 제주의 토속신들이 새해 인사를 드리러 옥황상제에게 올라 시기이기에

이사를 하거나 집을 고치도 '동티'가 나지 않는다는 속설이다. 

 

그래서 제주에서 이사는 신구간에만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많이 사라져 가는 풍습이다. 

 

<뽀로재 11대 할아버지 묘소에 있는 동자석>

 

이와 달리 모듬벌초는 '음력 8월 초하루'에 한다.

 

이 날은 친족들이 모두 '조상의 묘'에 모여 다 함께 벌초를 하는데,

보통은 10대조 이상 되는 조상이 묘이기에 여러 파에서 많은 친족들이 오게되며

1년에 한 번이라도 같은 조상을 둔 혈족임을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우리 집안 모듬벌초는

위미리 지경 '산여왓' 군위 오씨 입도 10대손, 익자 성자(翊星) 조상의 묘이다.

 

현재 20대 손까지 모듬 벌초에 참여하고 있으며

제사를 함께 드리는 친족으로 나누면 8개 가지에 500명 정도 자손이 있다. 

 

 

오래 전에는 모듬 벌초날이 되면

소가 끄는 마차 여러 대에 점심을 준비하고 와서 산소 주변에서 식사를 했었는데

이제는 도로 교통의 발달로 마을에 있는 식당에 가서 단체로 식사를 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친족들의 길흉화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제례나 친족 공동재산 관리 등 여러가지 문제들을 조율하게 된다. 

 

 

우리집안은 12대 ~ 14대까지 3대에 걸쳐 독자로 이어 졌다가

나의 부친 세대 17대 이후에야 자손들이 번창하였기에

조상의 묘가 많지 않아 벌초에 대한 부담이 적다. 

 

그래서 모듬벌초 하는 날 다른 조상의 묘소도 함께 벌초를 하게 된다.

 

오래 전 부터 벌초하는 날은 친족 모두가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래서 학생을 비롯한 남자들은 모두 벌초를 함께 해야 했는데

아마도 조상 산소의 위치를 잘 기억해 두라는 뜻이었던것 같다.  

 

 

제주의 들에는 많은 묘들이 있었다.

소위 산터를 보고 망자를 모셨기에 좋다는 지역에는 묘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조상의 묘를 벌초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전해 내려왔는데

그도 그럴것이 들에 나가보면 다 비슷한 산소들이어서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던것 같다.

 

제주의 무덤에 돌로 담을 쌓는 '산담'이 특징이다.

방목을 하는 소나 말 그리고 들짐승들에 의한 산소의 훼손방지가 목적이었는데

차츰 겹담을 쌓으며 산소의 크기와 가문의 위세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도

우리 제주의 무덤처럼 산담으로 묘소를 아름답게 단장하는 데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제주의 산담을 유네스코 장제문화 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면 어떠까?

 

 

산담에는 영령들이 드나들기 쉽게 돌로 만든 신문이 있다.

 

이 ‘신문(神門)’은 무덤의 망자가 바깥(산담 밖)에 외출을 하기 위한 문,

즉 봉분은 망자의 집이고 ‘산담’은 집의 울타리, 신문은 대문으로 그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예전에 비문은 한자로만 썻다

그래서 아름다운 제주어 지명을 억지 한자로 바꾸어 놓은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산여왓(산이 있는 넓은 밭) 山伊田(산이전)

동내골(동쪽에 있는 작은 내 골짜기) 東川谷(동천곡)

비애기모루(병아리가 넘기 힘든 언덕) 飛龍地(비룡지)

뽀로재(뾰쪽하게 생긴 동산) 猪木洞(저목동)

 

원문과 비슷한 뜻도 있고 전혀 다른 한자도 있는데,

산소가 없었다면 벌써 사라져버렸을 지명들이다.

 

 

제주에서는 낫을 호미라 부른다.(호미는 골갱이로)

 

이렇게 벌초하는 날은 각자 호미를 들고 가는데

최근에는 벌초를 대부분 예초기로 하고 호미는 마감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조상을 모시는 마음이 우리나라만큼 지극정성인 곳도 많지 않을 것이다.

 

300년전 조상의 묘소까지도 벌초로 단장한 후

산소에 제물을 차려 절을 한 후 제물은 나누어 먹게 된다.

 

 

집안의 묘소에 벌초을 하고 나면

다 함께 모여 앉아 시원한 막걸리로 조촐한 파티를 한다.

 

아직까지는 형제 항렬이 많아 벌초를 친족의 축제날처럼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이 후의 벌초는 우리의 후대에서 할 일,

벌초가 힘들어 산소를 이장하던지 전문가에게 맡겨 버리든 걱정 하지 말자.

 

예전에 모듬벌초는 제주도 전체적으로 대단한 중요행사였다.

 

우선 팔월초하루가 되면 초중고학교에서는 '벌초방학'을 했다.

대부분의 직장은 휴무일이었고 육지부에 사는 친족들은 물론

공직자들까지도 휴가를 받아 모듬 벌초에 의무적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차츰 핵가족화 바쁜 일상으로 모듬벌초 참여인원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

오래지 않아 제주의 '모듬 벌초'도 차츰 살아져 버리는 풍습이 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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