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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자연

제주의 5월 장마

by 나그네 길 2021. 6. 25.

제주에서 예전에는 오월 장마라는 말을 많이 썼다.

음력 오월은 양력으로 대략 6~7월이다.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한 달 이상 흐리고 비 내리기를 반복하는 특이한 시기가 든다. 이른바 제주의 5월 장마였다.

 

어릴 적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5월 장마에 대한 표현이 우습다.

“‘왁왁 일레’ ’주룩주룩 열흘‘ ’빼쪽일레‘’우릉쾅 사흘‘”

5월 장마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한 달간을 아주 맛깔나게 표현하고 있는 이 말을 풀이해보면 정말 현대에서도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 말 일레이렛날즉 일주일을 말한다.

왁왁일레에서 왁왁캄캄하다이므로 즉 장마의 시작은 먼저 어두울 정도로 자욱한 안개가 일주일간 계속된 후 장대비가 주룩주룩 열흘 동안 쉬지 않고 내리게 된다.

 

장마의 후반부에는 일주일 동안 구름 사이로 강한 태양이 나오고 들어가지를 반복하는데, 이때 잠간씩 비추는 햇볕이 너무 강렬하여 "장마철 햇볕에 중대가리 벗겨진다." 는 우스개가 있다. 마지막으로 하늘이 '벌러지는(깨어지는)' 무서운 천둥 번개가 사흘간 지속되면서 지루한 장마가 끝났음을 알리게 된다.

 

어릴 적 5월 장마철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학교에 등하교하는 일이었다.

비 오는 날 자동차는 물론 우산도 제대로 없었던 시절, 비료 포대를 뒤집어쓰고 걸어서 학교에 가면 옷은 이미 물먹은 솜이 되어 버린다. 그나마 맨발에 고무신을 신었으니 양말이 없어 다행이었다.

 

온종일 세찬 비가 내리는 가운데 교실은 아이들이 체온에 옷의 말라가는 쾌쾌한 냄새로 진동하였고, 점심시간에도 나가 놀 수도 없으니 정말 답답하고 불쾌했다는 기억이다.

 

5월 장마는 초가집에서도 계속된다.

제주에서도 서귀포는 연간 강수량이 전국 최고였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고 습도가 높은 지역이다. 물을 흠뻑 먹은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마당을 지나 골목으로 이어지면서 도랑은 어느새 작은 개울이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마루가 축축하고 방의 벽지도 축축하고 부엌에는 젖은 옷을 걸쳐 놓았으나 가득 찬 습기로 마르지 않는다.

 

그런 장마 가운데에서도 살아갈 재미를 찾았다.

5월에 수확하는 쌀보리를 볶아 '개역(미숫가루)'을 만들었다. 장마철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에 당원(설탕)을 넣은 보리 개역은 최고의 간식거리이자 비상식량이었다. 그리고 장마철엔 쉰 밥을 누룩으로 발효시켜 '쉰다리'를 만들었다. 약간은 달고 시큼한 맛 쉰다리를 음료처럼 마시며 장마철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제주에는 장마철에 피는 꽃들이 있다.

그중에서 치자꽃은 장마와 함께 피었다가 장마가 그치면 지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올 장마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서귀포의 치자는 피었다가 지고 있다.

이것도 이상기후이던가 올해는 꽃이 대부분 15일 이상 일찍 피고 있다고 한다.

 

초여름을 바라보는 6월말, 저녁마다 정방폭포를 거쳐 바닷가 자구리공원 일대를 산책하고 있는데, 치자꽃, 수국, 문주란, 산수국 등 5월 장마에 피는 꽃들을 미리 감상할 수 있으니 이것 역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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