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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자연

제주 벌초 풍습의 변화

by 나그네 길 2021. 9. 5.

제주에는 아직도 여러 분야에 괸당(친족)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제주의 독특한 풍습 중에는 식개(제사), 명질(명절), 잔치(결혼 피로연), 영장(장례) 등 여러 분야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모듬 벌초는 제주만이 가질 수 있는 특이한 괸당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제주에서 벌초하는 날은 음력 8월 초하루로 정해 있었다.

팔월 초하루가 되면 비가 오나 바람이 불거나 친족들이 모두 모였다. 심지어는 서울에서 내려오기도 하고 직장인들은 휴가를 받았으며 어쩔 수 없이 벌초에 참여 못 할 경우는 금품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제주도의 학교들은 음력 8월 초하루에 벌초방학을 하여 학생들이 벌초에 참여하도록 했으며, 공무원과 지역농협에서도 벌초 휴가를 주기도 하는 등 모듬 벌초는 제주지역의 특이한 풍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제주에서 벌초는 아직도 가장 중요한 친족 행사 중에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추석 전에 미리 조상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난 후, 명절날에는 모두 함께 친척 집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어 먹게 된다. 벌초와 명절을 친족들이 모두 함께하는 괸당문화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조상의 묘소는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아 마을 공동목장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데 30km를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산소도 있다. 오래된 집안이 경우에는 몇 대조의 자손들이 모두 모여 벌초를 하는데 이를 모듬벌초라고 한다. 우리 집안의 경우는 8대조 할아버지 묘에 5개 집안에서 100여 명이 모여 모듬벌초를 하고 있다. 이처럼 모듬벌초를 함께하는 친족을 괸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제주도에 입도조 묘소가 있는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을 모두 괸당으로 부를 수 있으니 친족의 범위가 얼마나 광범위한 개념인가 알 수 있다. 우리 집안 군위오씨(軍威 吳氏) 입도조 석현(石賢)공은 600여 년 전 제주도에 귀양 차 입도하여 현재 25대까지 자손이 28천여 명에 이르고 있으니, 제주에서는 이들 모두를 괸당으로 부르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제주의 모듬벌초 풍습도 최근 들어 많이 변하고 있다. 그 첫째가 핵가족화로 조상에 대한 공경심이 약해지면서 벌초 참여율이 낮아지고, 그다음은 서울 등 타지에 정착 거주하는 친족들이 늘어나 같은 날 동시에 벌초를 함께 하기가 사실상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묘소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벌초를 할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 집안도 현재까지는 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친족들이 많이 있기에 아직은 모듬벌초를 하고 있으나, 우리 아들 대 조카들은 대부분 서울 등 외지에서 거주하고 있어 벌초에 참여하기가 어려울 것이 자명하다. 이미 고향 위미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친족들은 대부분 5~60대가 주류를 이르고 있어 모듬벌초 풍습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또한 제주의 장례문화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뀌는 추세이고. 소위 명당을 찾아 산야에 흩어져 있던 조상들의 묘소들도 친족 공동묘지로 이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향후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자손들에게 벌초가 문제로 대두되는 경우를 예상하여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제주에는 소분전이라고 부르는 밭을 대를 이어 가며 장자에게 물려주어 왔던 풍습이 있다. 소위 제사와 벌초를 명분으로 소분전이라는 핑계를 만들어 재산 대부분을 장자에게 상속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제사와 벌초는 장 차남 자손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으니 벌초와 제사 그리고 상속에 대한 제주의 풍습에도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다.

 

벌초풍습과 같은 제주의 괸당문화를 잘못 이해하여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괸당끼리 똘똘 뭉쳐서 서로가 서로를 봐주면서 일을 한다는 소위 혈연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사회에 이러한 봐주기 문화는 학연과 지연  그리고 최근에는 586 운동권 출신들 중에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국가 사회적으로 이익집단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며 비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비하여, 제주의 괸당문화는 벌초와 같이 일을 함께 하고, 명절과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 가장 소박한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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