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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여행길

김기량 순교기념관 도슨트

by 나그네 길 2022. 4. 26.

도슨트(Docent)란? 

박물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전문 안내인을 말한다. '가르치다'라는 뜻의 라틴어 'docere'에서 유래한 용어인데,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대학의 교수 직위를 말하기도 할 정도로 소정의 전문 지식을 갖춘 해설사이다.

 

지난 토요일 제주도인 중에서 첫 번째 천주교 신자이며 순교자인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 영성을 기념하는 김기량순교기념관축복식이 있었다.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님이 주례로 가진 축복식이 끝난 후 순교기념관을 위한 도슨트 교육에 참석했는데 여러 가지 새로운 사연들을 알게 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사 -

 

복자 김기량(1816~1867)은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작은 배를 이용하는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18572월 배를 타고 서귀포로 가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한 달여를 표류하다가 영국 상선에 구조되어 홍콩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연히 조선인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되었고, 1857531일 루세이유 신부로부터 펠릭스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제주인으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중국에서 육로를 통하여 1년여 동안 고생하며 조선으로 귀국하여 최양업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1858년 5월 표류한지 1년여 만에 제주도로 돌아와 고향에서 집안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제주에 신앙의 씨앗을 전파하였다. 1864년 배를 타고 무역을 나갔다가 다시 풍랑을 만나 두 번째로 일본 나가사키로 표류하게 된다. 일본에서 프티장 신부로부터 묵주를 받았으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무사히 귀향하였으며, 18662월 리델 신부를 방문하여 자기 배의 사공 2명을 영세 시켰다.

 

김기량은 186610월 병인박해 때에 경상도로 무역을 나갔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통영에서 체포되어 문초와 곤장을 맞으면서도 배교하지 않았다. 18671월 형벌로 교수형에 처해 졌으며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가슴 위에 대못을 박고 장열하게 순교하였다.

제주교구에서는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이 시작하였으며, 2014816일 광화문광장에서 프란시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제주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복자로 시복되었다.

 

2012년부터 10년 동안 순례길 해설사를 해 오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사연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해설 봉사를 통하여 나에게 주어졌던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던 것 같다.

그중에서 교회의 역사와 제주의 생태 환경 그리고 지역 문화를 연구하면서 나만의 달란트를 만들 수 있었음은 커다란 성과였다.

 

이제 이러한 순교기념관의 도슨트 교육을 통하여 전시품을 충분히 이해하고 배울 수 있었으며, 순례길 해설사와는 또 다른 전문 분야로 나아갈 수 있는 기초를 알았기에 서귀포에서 여기까지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복자 김기량은 한국의 순교자 중에서도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많은 성인과 복자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 홍콩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풍랑을 만나 중국과 일본으로 표류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조선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 등 3개국에 있는 천주교 사제를 모두 만나본 신자이기도 하다.

이는 김기량 순교기념관의 상징물인 배와 대못으로 이루어진 돛대로 나타나 있다.

 

이제 제주에 천주교가 들어온지 120 여년 이 지나면서 서쪽 한경면에는 김대건 성인의 표착 기념관인 용수성지가 있다고 한다면, 제주의 동쪽 조천읍 함덕리에는 복자 김기량 순교기념관이 위치하게 되어 성인들의 기념관이 제주도를 좌우로 감싸는 형국으로 축복받은 섬이 되었다.

 

이렇게 바다에서 거센 바람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순교 영성은 초가집 형태로 지어진 자그마한 기념관에서 전문 도슨트를 통하여 순례자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게 되었음은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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