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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여행길

김기량순례길을 가다.

by 나그네 길 2022. 6. 22.

김기량순례길(8.7km)은 조천성당에서 시작하여 함덕리 김기량순교기념관까지 걷는 길이다.

 

김기량 펠릭스베드로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제주도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복자품에 시복되셨다. 이에 천주교 제주교구에서는 복자 김기량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기량순례길'을 조성하고 '김기량순교기념관'을 개장하였다.

 

그동안 코로나 셧다운으로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던 순례길 해설사모임에서는 모처럼 김기량길을 걷기로 하였다.

김기량길은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아름다운 바닷길이며 도착지에는 지난 4월 개관된 김기량 기념관이 있어 순교 복자의 일생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기에도 좋았다.

 

김기량순례길은 제주올레 19코스(조천~김녕)와 대부분 겹친다. 연북정과 관곶 그리고 신흥바다 방사탑과 물빛 고운 함덕해변 등 제주의 가장 아름다운 해변 모습들을 지루할 틈 없이 펼쳐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함덕해수욕장에서 정겨운 골목길을 지나 순교기념관까지 이어지는 마을 안길에서는 고단함 보다는 순교 영성을 체험해보려는 순례자들이 설래임이 담겨있다. 

 

순례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은 누구나 형제 자매가 된다.

그리고 누구나 어릴적 바다를 기억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그만큼 조천 ~ 함덕 해안길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어울리는 쪽빛 바닷물에 빠져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복자 김기량(1816~1867)은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작은 배를 이용하는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1857 2월 배를 타고 서귀포로 가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한 달여를 표류하다가 영국 상선에 구조되어 홍콩에 도착했다.

 

김기량은 여기서 우연히 조선인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되었고, 

1857 5 31일 루세이유 신부로부터 펠릭스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제주인으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다.

 

1858년 5월 표류한지 1년여 만에 제주도로 돌아온 김기량은 고향에서 집안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제주에 신앙의 씨앗을 전파하였다.

 

그는 1864년 배를 타고 무역을 나갔다가 다시 풍랑을 만나 두 번째로 일본 나가사키로 표류하게 된다. 일본에서 프티장 신부로부터 묵주를 받았으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무사히 귀향하였다.

 

김기량은 1866 10월 병인박해 때에 경상도로 무역을 나갔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통영에서 체포되어 문초와 곤장을 맞으면서도 배교하지 않았다.

 

1867 1월 형벌로 교수형에 처해 졌으며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가슴 위에 대못을 박고 장열하게 순교하였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4위와 함께 복자품에 시복되었다.

 

함덕 해변은 이미 여름이 되었다.

150년 전, 선원이었던 복자 김기량도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함덕 해변에서 가족들과 물놀이를 했을지 모른다.

오늘 쪽빛 바다에서 물놀이 하는 가족들과 순례자들이 함께 어울리니 이 모두가 복자의 뜻이런가?

 

마을로 들어서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다.

그리고 제주도 초가 형태의 기념관이 주변과 잘 어울리면서 정겹게 순례자를 반겨 준다.

  

복자 김기량은 한국의 순교자 중에서도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많은 성인과 복자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 홍콩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풍랑을 만나 중국과 일본으로 표류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조선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 등 3개국에 있는 천주교 사제를 모두 만나 본 신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복자 김기량의 이력은 순교기념관의 상징물인 배와 대못으로 이루어진 돛대로 나타나 있다.

 

지난 2년 여 동안 몹쓸 역병 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은 억눌렀던 기간에도 제주의 자연은 싱싱하게 살아있었다. 또한 우리들 역시 각자의 방법으로 코로나 팬데믹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 일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오늘 그동안 중단되었던 순례길 걷기 행사에 참여한 해설사 멤버들은 많이 달라졌지만, 이렇게 상큼한 표정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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