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주의 자연

민들레 영토 - 이해인 詩

by 나그네 길 2013. 4. 5.

우리 사무실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민들레꽃을 보면서 끈기의 세월을 느낀다.

 

민들레의 영토 -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聖스러운 깃발

 

太初부터 나의 領土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鎭珠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人情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江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세월의 눈시울에

原色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민들레의 연가 -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날마다 봄하늘에 시를 쓰는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 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얇은 씨를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 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해에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우리 사무실 앞에 아스팔트에 예쁜 민들레가 있었다.

그제부터 노오란 꽃을 피우는데 이틀

하얗고 둥그런 민들레 홑 씨가 된지는 하루

그리고 점심을 먹는 사이에 민들레 홑씨는 바람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민들레야!

겨우 사흘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그 겨울의 추위를 지나

아스팔트를 뚫으며 그렇게 끈길진 생명력을 이어왔느냐?

허무한 마음에 부지런히 사진을 눌러 카카오 스토리에도 올려주었다.

「두레박」中에서 수녀님! 사랑합니다.

이는 나 혼자 만들어 불러 보는 노래이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왕에게 몹시 미움을 받은 운명의 별이 땅에 떨어져 민들레가 되었고,

하얀 씨가 날개를 쳐 하늘을 나는 것도 모두 별의 혼을 타고났기 때문이라 한다.

 

 

또 옛날 이 땅에 큰 홍수가 났을 때 다른 것들은 다 피신해도

뿌리가 깊은 작은 민들레만 물에 휩싸여 죽게 되었다.

이를 불쌍히 보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의 씨엔 날개가 돋쳐 하늘로 떠오르고,

그 씨는 바람에 인도되어 햇볕 잘 드는 땅에 새로 피게 되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민들레는 그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금빛 얼굴로 하늘을 우러러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민들레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에 촉촉한 봄비가 내린다.

배시시 웃으며 피어날 그 노란 꽃과의 만남에 소녀처럼 설레며

하늘을 쳐다보면 주홍의 도포를 펄럭이는 낯익은 해의 얼굴.

나는 문득 수줍어 얼굴을 가리며

"사랑합니다."를 고백하는 민들레 여인이 되고 싶다.

 

 

지금부터 열두 해 전의 이른 봄, 나는 까만 치마에 흰 저고리를 받쳐 입은

풋내기 자매로 수녀원에 입회해서 꽤는 명랑한 날들을 이어 갔지만

안개처럼 스쳐 가는 알 수 없는 불안과 슬픔에 종종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미 각오하고 나선 길이면서도 어려움이 많았고,

그 어려움은 거의 내면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가 두고 온 사랑하는 이들과의 결별이 아쉬워 몸살을 했고,

그들을 그리워해선 안 된다는 일종의 죄책감에

엎치락뒤치락 잠을 설치며 스스로를 학대했다.

 

인간 모두를 사랑하되 하나를 갖지 않고 하나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초연히 모두를 사랑한다 함은 너무도 아득한 일로 여겨지곤 했다.

 

내 약한 마음이 지향할 바를 몰랐던 그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지도 수녀님을 찾아가서 아무래도 나갔다가 다시 오는 게 좋겠다는

내 나름의 뜻을 전했고, 나는 호된 꾸중만 듣고 울면서 그분의 방을 나왔다.

 

 

그럭저럭 일 년을 보내고 난 다음 해, 우리는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안리 수녀원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을 산책하던 어느 날, 나는 극히 좁다란

돌틈을 비집고 당당히 피어난 노란 민들레를 보고 "아, 어쩌면..." 하고 솟구치는

기쁨에 몸을 떨면서 그의 정다운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넌 왜 고민하니? 나처럼 살면 되잖아. 네가 원하기만 하면 좁은 땅에 앉아서도

모든 이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 그는 내게 노래를 주었다.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민들레를 만난 것은 내가 안주해야 할 땅을 확인케 해 준 소중한 발견이었고,

그것은 나에게 사랑의 슬기를 깨치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아직도 가끔은 많은 이의 시선을 끄는 화려한 차림새의

장미 여인이 되고 싶은 허영이 살짝 고개를 쳐들 때가 있지만,

나는 민들레처럼 의연히 앉아 해를 보며 살기로 결심했다.

담담한 표정 밑에 뜨거운 언어를 감춘 기다림의 꽃은 결연히 말한다.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진한 향기를 뿜지 못하는 앉은뱅이의 촌스런 열등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부모가 된 어릴 적 친구들이 홀연 눈부시게 나타나

야릇한 연민의 눈길로 나를 싸안을 때

나의 자존심은 더러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러대로 뿌리를 내렸다 싶던 나의 신념도 가끔은 불확실했고,

꼭 만나야 할 애인의 모습은 오리무중일 때가 허다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미 사랑의 포로가 되어 있었고 그 사슬을 풀어낼 수 없었다.

비록 비극을 초래할망정 「햄릿」의 오필리아나 「오셀로」의 데스데모나같이

극히 인간적인 사랑을 원했던 나의 꿈은

어떤 절대의 힘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보일 듯하다간 다시 멀어지는 그 사랑을 찾기에 나는 얼마나 지쳐 있었던가.

오랜 세월을 지나 겨우 사귄 나의 임은 무례한 폭군은 아니었으나

다분히 오셀로 적인 질투도 잊지 않으면서 서서히 접근해 왔다.

 

로미오와 같은 달콤한 감상도 맥베스 같은 야심도 없으면서

이상한 마력으로 나를 끌어당기던 힘 -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경이로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나의 호기심과 곁눈질을 그는 용케 알아차리고

골탕을 먹였고 그래서 나는 약이 올랐다.

 

 

보이지 않는 사랑을 위해 소리 없이 부서지는 내 파란 젊음이

왠지 억울하게 느껴져 회의에 빠졌다가도

흔연히 일어설 수 있음은 은총의 놀라운 기적이었다.

엉겅퀴처럼 돋아난 오만한 저항의식이 순명의 '네'로 무릎끊을 수 있음도

은총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사랑의 영 -

그 폭풍 같은 힘을 나는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해는 민들레를 사랑했고 민들레가 그에게 사랑을 바쳤을 때

민들레는 세상에서 가장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미소를 흩날리게 되었다.

 

나는 많은 날을 착각 속에 빠져 허둥댔으나 그 과정 역시 필요한 것이었고,

수녀 역시 사랑하는 여인임을, 그 사랑의 시력이 높아졌을 때

그는 감히 인류의 애인도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젠 아무도 뺏을 수 없는 은밀하고 보배로운 행복에

차라리 한숨 쉬며 민들레는 오늘도 이야기한다. "사랑하올 임금님,

당신이 끼워 주신 언약의 반지에 제 사랑을 묶었습니다.

노오란 제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당신은 오시렵니까?"

 

그는 빙그레 웃음으로 대답해 올 것이다. "많은 물도 사랑을 끄지 못하고

강물도 이를 덮지 못하느니 작은 자여 내게로 오라. 겨울이 나고 비도 지났도다."

 

 

아,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놀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르는 것을, 보고 싶은 얼굴이여.

 

 

1977. 가톨릭 문우회 수상집 「아담에게 하와에게」

 

'제주의 자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하(양애)이야기  (0) 2013.05.13
무지개(詩)  (0) 2013.04.28
중문의 봄  (0) 2013.03.22
중문의 아름다운 벚꽃길  (0) 2013.03.22
중문색달 해변(중문해수욕장)에서  (0) 2013.03.0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