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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사람들

신축교안(이재수의 난)

by 나그네 길 2013. 7. 13.

최근 신축교안 또는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1901년 제주민란에 대한 책을 저자로 부터 선물받았다. 

 

이 책은

제주도 근대사 연구에 대가이신 제주대학교 박찬식 박사님이

근대 외래문화와 토착문화의 갈등을 연구하고 

일반인들이 읽기에 부담이 없도록 저술하여 발간한 책이다.

 

이 제주민란은 제주의 근대사에 잘 알려져있지 않은 또 하나의 비극이다. 

나는 최근까지 신축교안(辛丑敎案)을 신축교난(辛丑敎亂)으로 잘못 이해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교안과 교난을 어느정도 구분 할 수 있었다.

 

- 교안(敎案) : 교회의 사안, 반교회 운동(Anti Christian Movement), 해서교안

(종교 문제 또는 종교 문제와 관련되어 벌어진 다툼이 정치적, 행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안을 표현하는 보편적 의미를 지닌 역사 용어)

- 교란(敎亂) : 종교에 의한 민란,   동학난(동학 혁명),  중국 태평천국의 난 

- 교난(敎難) : 교회가 껶고있는 어려움,  종교의 갈등으로 일어나는 어려움

 

 

1901년 제주민란은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축교안'이라 부르고 있으나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일반에 널리 알려져있는데, 

 

신축교안의 원인을 보면

1900. 6월 서귀포지역에 천주교 하논성당이 설립된 이후

지역사회에 천주교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신당파괴와 같은 민간신앙 배격으로 토착민들과 갈등을 빚었으며,

 

조정에서 파견한 봉세관이 

천주교인을 동원하여 조세를 걷는 과정에 여러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고

당시 조세권을 향유하고 있었던 토착 지배세력의 반발을 가져오게 되면서 

결국에는 주민들이 천주교 교인들과 충돌하면서 무장봉기하는 민란으로 이어졌다.

 

<사진 : 천주교인들이 살해당해 시체가 관덕정 앞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1901. 5. 6. 대정에서 상무사와 천주교민들이 충돌하자

민란주도자들이 민군들을 무장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였고

5.28일 민군들은 제주읍성을 포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관덕정 앞에 천주교인들을 모여놓아 살해하는 참극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후 6. 10일 조정에서 군인들이 도착 민군에 대한 해산령과 함께

민군대표 체포까지 천주교인 600여명이 피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학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당시 조정에서 파견된 평리원 검사의 공식적으로 집계한 사망자 숫자는 천주교인 309명, 평민 8명이었다. 

 

<제주민란 당시 제주 관덕정...불타고 피폐해져 있다.>

 

이 신축교안 수습과정에서

연고가 없는 교민들이 시체는 제주시 별도봉 하천에 버려졌다가

조정에서 제주시 황사평 부지를 천주교 공동묘지로 내주어 희생자들을 이장하였으며

그 후 천주교 제주교구에서는 황사평 묘지를 교구의 성지로 조성하게된다. 

 

제주시 황사평 벌판은

민군들이 주둔하면서 제주성을 공격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는데,

그 민군에 의해 살해된 교인들이 다시 황사평에서 잠들고 있는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하논성당 박고스마 회장이 김원영 주임신부에게 보낸 편지>

 

<당시 살해당한 박고스마 회장의 편지 발췌>

 

생략 ......아뢰올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방금 상무사 수령 오을길, 마천삼, 김백이, 강희봉이 모두 부화뇌동하여 무리를 지어가지고

갑자기 각 마을의 백성들을 수십만군으로 내몰아서,

만약 교우를 만나면 결박해 구타하니 혹은 상하고 혹은 사망한자가 부지기수로소이다.

하논의 교인들이 허둥거리며 달아나

남자교우는 모두 제주성당에 모이고,여자교우는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후략

 

<하논성당 설립자 김원영 신부>

 

신축교안의 한쪽 당사자인 김원영신부는

제주도 남쪽 서귀포시 하논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실시하면서,

1889년 11월 하논공소를 설립하여 신자 20명 예비자 30명을 두었으며,

다음 해 1900. 6. 12 하논성당(현 서귀포성당의 전신)을 설립하여

신자수 137명 예비자 620명을 기록할 정도로 왕성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급격한 천주교의 교세확장 과정에서

제주지역의 민간신앙에 대한 거부감으로 '수신영약'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신당파괴 등 토착민의 정서에 반하는 선교활동으로 교세는 확장되었으나 

지역민과의 갈등을 야기시킴으로써 신축교안의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신축교안과 관련하여

어느 신부님이 가톨릭 뉴스에 기고했던 글을 떠 올린다.

".....신축교안은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떤한가를 보여 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

 

 

 

가톨릭 뉴스 칼럼
성금요일에 4.3과 신축교난을 묵상하다<기고-고진석 신부>
고진석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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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4.03  17:58:02

 

성금요일 예식은 언제나 버겁다.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재현하는 예식이다.

의롭고 무죄한 이에게 죽음을 요구했던 광기어린 인간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유혈과 폭력으로 뒤범벅된 현장이다. 유려한 수사와 애절한 곡조가 살벌함과 비참함을 여과시켜주었기 망정이지,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할 끔찍한 광경이었으리라.

 

하지만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장면이다.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고 그날에 일어났던 일들을 낱낱이 기억해야 옳다.

이성이 마비된 이들이 죽음을 부르짖던 그 자리, 대(大)를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소(小)를 희생시켰던 그 자리,

손가락질 하나로 삶과 죽음이 갈렸던 그 자리, 아비규환의 그 현장이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어야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피를 부르는 그리스도인

예수의 피에서 싹이 튼 그리스도교는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라났다.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박해가 따랐고 피가 튀었다.

그들이 기다리며 선포하던 하느님 나라가 세속의 권력자들에게 큰 위기감과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았건만 죄인으로 고발되었고 애써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를 모르오.”(요한 18,25 참조) 한마디 말이면 목숨을 구할 터인데, 그들은 끝내 그 말을 뱉지 않았다.

결국 박해하던 이들은 무력하게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손을 들었다.

그리스도가 승리했지만 그리스도의 평화는 오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피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의 삶은 어느새 투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피로 점철된 역사를 이어나갔다.

그들은 하는 일마다 하느님의 이름을 걸었으나 그것이 진정 하느님이 원하시던 바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단자들을 처단했고 이교인들을 쓸어버렸다.

그들에게 순종하지 않고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제거하는 일에도 하느님의 정의가 들먹여졌다.

심지어는 전쟁을 일으켜 살육을 일삼는 현장에서도 반드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스승이요 주님인 예수를 본받아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겠다던 사람들이

 도리어 자기들이 만든 우상에 바칠 희생제물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리스도의 향기를 만천하에 풍겼던 거룩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들의 가냘픈 목소리는 광기어린 함성에 묻혔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메아리쳤다.

 

신축교난의 교훈 “종교가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의 폐단을 기억하라”

 

먼 옛날의 이야기도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니다.

지난 백 년 동안 내 고향 제주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두 가지 사건,

 “신축교난”과 “4.3 사건” 역시 그리스도교 피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룬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았으며 어머니, 아버지가 들은 일이다.

이재수의 난이라고 알려진 신축교난을 표면적으로 보자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편견과 반감을 가진 도민들이 자행한 천주교인 학살이다.

1901년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이 주동하여 일어난 민란에 317명의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다.

 

교회 입장에서는 제주 선교 초기에 뿌려진 고귀한 순교자의 피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다른 말을 한다. 사실 민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천주교인들이었다고.

당시 천주교는 백여 년의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1886년 6월 한불통상우호조약으로 얻은 선교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신부들에게 호조(護照, 여권)가 발급되고 ‘여아대’(如我待―나처럼 대하라)라는 어명까지 내려졌으니,

천주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임금을 등에 업고 섬에 들어온 천주교에 신앙심과 무관하게 입교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서울에서 내려온 봉세관 강봉헌이 왈짜패 같은 천주교인들을 세금 걷는 마름으로 두면서 사달이 났다.

성당을 지으면서 마을 신목(神木)을 마구 잘라버려 가뜩이나 인심을 잃은 터에,

천주교인들이 세금 징수를 빙자하여 온갖 비행을 저질렀고 신부는 그를 두둔했으니 천주교를 향한 도민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온 섬에 통문이 돌았고 도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성난 민중들이 행한 분풀이는 결국 무고한 천주교인들에게까지 미쳤다.

이는 교회가 받은 수난(敎難)이기고 했지만 동시에 교회가 야기한 난리(敎亂)이기도 했다.

 

도민들은 아직도 민란을 주도한 세 사람을 의사(義士)라고 기억한다.

민란의 시발점인 대정(大靜) 고을에 세워진 ‘삼의사비’(三義士碑)에 적힌 글귀는

복음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따끔한 경고가 된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신축교난은

 ‘백서사건’(帛書事件)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가 대정 고을에 유배를 온지 꼭 백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배생활의 어려움 중에서도 반듯한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보여주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던 그의 삶은

신축교난 때 흘렸던 많은 이들의 피로 이내 지워져버렸다.

신축교난 이후 해방이 될 무렵까지 제주도에서 천주교 선교는 지지부진했다.

 

4.3 사건 중심에 있던 서북청년단의 70%가 개신교 ‘그리스도인’

그 후 반세기가 채 못 되어 제주에는 다시 피바람이 미친 듯이 휘몰아쳤다.

제주 사람들의 치유 되지 않은 상처이자 못다 한 이야기인 4.3 사건이다.

미군정의 미곡정책의 실패와 친일파 등용 정책을 규탄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단독선거를 반대하던 남로당이,

1948년 4월 3일에 일으킨 무장봉기는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이 사건도 피를 부르는 그리스도인들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 장총 30정으로 무장한 350여 명의 빨치산이 일으킨 봉기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이 공식적으로 14,028명이다.

가족 전체가 토벌대에게 몰살된 경우가 허다해서 희생자 숫자는 2만5천명에서 3만명까지 추산되며,

이는 당시 제주도민의 10%를 웃도는 숫자이다.

10세 이하 어린이(5.8%, 814명)와 61세 이상 노인(6.1%, 860명)이 전체 희생자의 11.9%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 희생자도(21.3%, 2,985명) 상당수를 차지한다.

여기에 빨치산에 희생된 1,764명이 추가되었으니 당시 제주 땅은 무고한 이들이 흘렸던 피로 질척거렸을 것이다.

 

이 피바람의 중심에는 서북청년단이라는 단체가 있었다고 제주 사람들은 증언한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다.

북한에 소련 군정이 실시되면서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좌익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1947년에 그들은 신임 도지사의 경호를 위해 제주에 들어와 민폐를 끼치고 있었고,

4.3 사건이 발발하자 경찰이나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어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구실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혹한 일들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제주 읍내의 유지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그들에게 총살당하거나 고문치사 당했으며,

법원장이 연행되었고 현직 검사를 비롯한 법조계 인사들마저 끌려가 즉결처분되었다.

또한 당시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를 강제로 접수했으니, 힘없는 도민들이 당했던 일은 더 말해 무엇하랴!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 종로 YMCA 강당에서 결성되었는데 그중 70%가 개신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들의 배후에는 “대한민국을 위해 전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고 말한

경무부장 조병옥이 있었고, 누구보다도 “반항하면 다 죽여도 좋다”는 이승만 대통령이 든든히 받쳐주고 있었다.

 

피의 역사 한가운데에 선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주에서 피바람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나

그 뒤를 봐주던 이들이 죄다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 씁쓸함을 넘어 역겹기까지 하다.

그들의 입에서 예수를 죽일 명분을 세웠던 대제관 가야파의 말(요한 11,50 참조)이 나오고 있으며,

 예수를 죽이라고 고래고래 함성을 지르고 있지 않는가(요한 19,15 참조).

 

그렇게 세상의 광기에 휩쓸린 그리스도인들은 무수한 예수를 살해해왔던 것이다.

4.3 사건을 경험한 어른들은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회고한다.

지금도 이성을 잃은 인간의 광기가 세상 곳곳을 휩쓸고 있으며 무죄한 이들의 피가 땅을 적시고 있다.

되풀이되는 증오와 폭력, 스스럼없이 자행되는 복수와 그로 말미암은 죽음의 행렬.

이 비참한 인간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인이 처해야 할 자리는 과연 어디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는 무엇인가?

적막함으로 채워진 성금요일 밤,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고진석 신부 (<분도> 편집장,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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