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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사람들

제주 4.3과 교회

by 나그네 길 2013. 11. 10.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1일을 기점을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4.3특별법에는 4.3사건의 정의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으나

제주민들은 각자의 경험과 시각에서 여러가지 각도로 4.3을 바라보며 해석한다.

 

그러나 제주의 4.3은 사건 발단과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에 의하여

제주도민의 10% 상당인 25,000여명 이상이 희생된 너무나 가슴 아픈 현대사이다.

 

 

그렇다면 그 4.3사건의 기간동안

우리 천주교회는 무엇을 하였으며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하여 서귀포성당에서는

지난 금요일 역사 역성 세미나 4번째 강의에서 제주대학교 박찬식(시메온) 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박찬식 교수는 제주의 근대사 신축교안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는 등

제주 4.3사건과 현대 교회사에 가장 권위있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는

하논성당 복원및 순례길 조성 사업 당시 책임연구원으로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1948년 4.3일

한라산 유격대 350여명이 무장하여 제주도내 경찰지서 12군대를 습격

경찰 및 우익인사 등 14명(경찰 4, 우익인사 8, 무장대 2)이 피살로 4.3사건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응한 미군정 경찰과 경비군 및 서북청년단 토벌대에 의하여

 무장대의 강경진압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와 관련 4.3희생자 신고 접수 결과 15,100명으로 집계되었지만,

미확인 희생자가 있어 실제로는 25,000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군인 전사자는 180명 내외, 경찰 전사자는 140명이다.

 

 

그러면 그 당시 제주도내 천주교회에서는 무엇을 했을까?

 

4.3사건 발발 당시

제주도내에 성당은 2개(중안성당과 서귀포성당) 뿐이었으며,

1952년 신창본당 승격이후에도 골롬반회 등 외국인 신부 3명만 있었다.

 

4.3사건 기간 중에 천주교회는

1947년~ 1954년까지 가톨릭구제회(N.C.W.C)를 통한 도민구호활동 사업을 했으며,

1948. 4. 28일 김익렬 경비대 9연대장과 무장대 김달삼과의 평화협정을 연계하는 등 

미군정과 무장대 사이에서 신임을 받았는지 천주교회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4.3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사안중에서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김달삼 사이 평화협정 추진에 대한 궁금했었는데,

 

다행히 김익렬 연대장이 유고록을 읽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의혹이 많이 해소 되었으며

그 유고록에서도 천주교회가 평화협정 추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평화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그리하여 나의 비밀참모 역할을 하게된 인물들은

제주신보 사장을 중심으로 읍내 천주교 신부와 몇몇 신자였다.

도내 민정의 말단에 관한 정보는 천주교 신자들의 공이 컸다.(김익력 9연대장 유고록)”

 

<사진: 4.3발발 후 제주를 방문한 미군정장관 하지 중장과 조병옥, 김익력 연대장 등>

 

4.3은 이 땅 제주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과제로 남아있으며

이 시점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님은 4.3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2013년 사목교서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소공동체"를 통하여 지역사회의 평화를 강조하셨고

실천목표에서 "제주 복음화의 역사와 제주 4.3바로알기,"

"생명과 평화를 이루기 위한 작은 실천하기(4.3유적지 방문, 추모, 기도)"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4.3 당시 모슬포에 있었던 경비대 9연대 막사>

 

이에 따라 2013년 사순절에는 "주교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과

 지난10월 묵주기도 성월에는 "묵주기도의 밤"을 4.3평화 공원에서 개최하면서

 교구신자 3천여명이 참석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하였다.

 

이와관련 박찬식 교수는 "교회의 4.3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실천"에서

"신학 등 학술연구와 4.3 유적지 탐방" 등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4.3은 세계 냉전구도와 한국의 분단체제가 빚어낸 사생아였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제주 섬사람들에게만 상처를 남겨 놓았다.

제주사람들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이념과 공권력에 휘들린 채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서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박찬식, 4.3과 교회)"

 

<사진 : 4.3사건 때 중산간 마을에서 산으로 도망간 주민들>

 

그리고 4.3 사건 때

하논성당이 자리잡았던 하논마을이 소개되어 폐촌이 되어버린 사례 등을 연구

새로운 평화순례길을 개발 방안 등을 추진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신촌초등학교에서 토벌군에 의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을 막아낸 경찰(순경 김순철)과 같은

 의로운 의인을 발굴 교훈적인 사실도 널리 알리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제주 4.3사건으로 희생된 모든 영혼들이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사진 : 4.3희생자 제주공항 집단 학살지 발굴 현장>

 

 

<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8. 1. 1 시행 >

  • 제2조 (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정 2007.1.24>
1.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2. "희생자"라 함은 제주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 된 자, 장애가 남아 있는 자 또는 수형자로서 제주4·3사건의 희생자로 결정된 자를 말한다.
3. "유족"이라 함은 희생자의 배우자(사실상의 배우자를 포함한다. 이하 같다) 및 직계존비속을 말한다.
 
 

 

< 4.3 사건 당시 무장대와 협상을 주도 했던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회고록 전문을 파일로 첨부하였다.> 

 
김익렬 장군( 4.3당시 9연대장) 유고.hwp

 

 

보수성향 4.3유족회 발족 도민갈등 우려(제민일보)

 

정부채택보고서 부정 논란
국가추념일 지정에도 반대
보수진영 인식전환 요구돼
등록 : 2013년 11월 08일 (금) 17:46:09 | 승인 : 2013년 11월 08일 (금) 18:20:34
최종수정 : 2013년 11월 08일 (금) 17:46:09
강승남 기자 stipool@hanmail.net
정부가 채택한 '4·3진상보고서'를 부정하는 등 보수성향의 유족회가 발족, 제주 4·3에 대한 왜곡이 우려된다.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완전한 해결을 약속한 4·3이 보수진영의 해묵은 이념공세에 시달릴 것으로 전망, 대응방안 마련과 함께 보수인사들의 인식전환이 요구된다.

 

제주4·3정립·연구 유족회(공동대표 이동해·오균택·홍석표)가 지난 7일 제주시 하니관광호텔에서 재향군인회 등 보수성향의 10개 단체 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들은 이날 창립선언문에서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좌경화와 역사를 왜곡하는 거짓의 길로 들어선지 오래"라며 "제주 4·3정부보고서는 4·3의 핵심이자 본질인 성격규정이 안된 반쪽짜리 보고서일 뿐 아니라 왜곡과 날조로 점철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특히 기존 유족회와 평화재단을 비난하고 4·3정부보고서 부정, 4월3일 국가추념일 지정 반대 등 제주도민의 한(恨)인 4·3의 완전 해결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동시에 또 다른 갈등·분열의 우려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창립기념식에 이어 강연에 나선 권희영 한국중앙연구원 교수는 "제주 4·3은 남로당이 대한민국을 공산화시키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며 "군인·경찰이 이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일부 양민의 인명피해가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4·3희생자유족회(회장 정문현)는 11일 운영위원회를 열고 향후 대응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문현 회장은 "국가추념일 지정 추진 등 제주4·3이 60년 만에 어렵게 화해·상생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며 "더 이상의 갈등·대립은 제주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강승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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