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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여행길

이중섭거리의 아름다운 간판들

by 나그네 길 2014. 1. 27.

우리나라 상장 기업 중에 100년이 넘는 기업은 몇 안되며

법인 회사 대부분은 인간의 평균 수명보다도 짧다고 한다.

 

결국 몇 십년 동안에 많은 기업이 흥망성쇠가 이루어 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서귀포의 문화거리로 알려져 있는 이중섭거리에는

얼마나 많은 가게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폐업하고 있는가?

 

 

오늘 이거리에 있는 여러 사업체들이

과연 십년 후까지 몇개가 살아 남아 영업을 계속하게 될 것인가?

 

 

서귀포의 명물,

전국에서 유일하게 화가 이름으로 명명한 이중섭거리,

서귀포시는 이중섭거리 명칭 하나로 문화의 도시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중섭거리에서는 정기적인 벼룩시장과 문화장터와 함께

한국실험예술제와 같은 문화공연과 전시회가 수시로 열리고 있다.

 

 

가난과 싸웠던 비운의 천재 화가, 대향(大鄕) 이중섭

 

한국 20C 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의 한 사람으로

현재 그의 작품은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반. 고흐의 경우처럼

그는 생전에 극도의 가난 속에서 불운한 삶을 살았다.

 

 

이중섭의 작풍(作風)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線畵)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되고

 대표작품으로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흰 소(홍익대학교 소장) 등이 있다. 

 

 

화가 이중섭은 6·25전쟁 때 원산에서 교편을 잡다가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피난살이를 했으며,

 

1951년 서귀포에 도착하여

겨우 한 평 남짓한 초가방 한 칸에서 일 년여 기간 동안 아내와 함께 피난 생활을 했다.

 

이렇게 이중섭이 서귀포와 인연을 맺은 기간은 얼마 안되었으나

담배 은박지에 서귀포 풍경을 그렸던 화가를 기리는 도로가 만들어져

이제 화가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어릴적 이 거리는 삼일빌딩 거리로 불렀다.

옛날 서귀포에서는 제법 큰 4층짜리 삼일빌딩 건물에는

당구장, 탁구장과 음악다방 그리고 양과점과 롤라스케이트장, 옷가게와 룸싸롱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

 

그리고 관광극장과 삼일극장은 물론 은행지점과 보험회사 사무실 등

예전엔 서귀포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이 거리가

이제는 산뜻하게 단장되어 예술의 거리로 변신하였다.

 

 

혹자들은

이 이중섭거리가 특색이 없는 흉내만 낸 거리라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서귀포 사람들은 말할 수 있다.

아무 쓸모도 없이 죽어가던 이 거리에서

 

어느 화가가 잠시 살았던 작은 초가를 발굴해 내어

차 없는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자랑할만 한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중섭거리를 걷기 좋아한다.

그리고 점점 아름답게 변해가는 가게 간판들의 아기자기함을 보고 즐기며

이 사업체들이 변화를 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간판들을 찍어 보았다.

 

과연 앞으로 십년 후에 다시 이 거리를 둘러 본다면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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