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60년도 더 지난 4.3사건 이야기가
매번 우리 집안의 맹질(명절)이나 시께(제사)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곤 한다.
벌써 잊혀질만도 하건만 이리도 오래 통한을 곱씹고 있음은
이제 4.3을 경험했던 형님 세대들이 겨우 세 분만 남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신정 명절을 준비하고 있던 1948년 마지막날에
당시 폭도 100여명이 우리 마을 위미리를 습격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제사용 떡까지 강탈해 갔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 고향 남원읍 위미리는
한라산 남쪽에 자리잡은 전통적인 해안가 농촌마을로
4.3사건 당시 300여호 1,500여명이 살아가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와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폭도라고 칭했던 무장대의 습격을 여러 차례 받아
주민 50여명이 피살되고 가옥 250여채가 불타고 약탈 당하는 처참한 피해를 당했다.
그리고 위 지도에서 보이는 1132번 도로 남쪽으로
위미초등학교와 동백나무 자생지를 바다까지 감싸는 'ㄷ'자형 성담을 쌓았으며
모든 주민들이 2~3일 간격으로 보초를 서는 생활을 계속하면서 마을이 완전 피폐되어 버렸다.
4.3사건 피해의 대부분은 경비군과 서북청년단 토벌대에 의한 만행이었다.
그러나 유독 우리 마을 위미리는
어째서 무장대의 공격으로 그렇게 많은 피해가 발생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릴적부터 폭도들이 만행을 들으면서 자라났기에
4.3에 대한 편향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것도 사실이었다.
"1948년 11월 28일 새벽 6시
무장폭도 약 200명과 비무장폭도 500명이 남원리와 위미리를 공격했다.
보고에 따르면 주택 250채가 폭도들에 의해 방화되었으며,
민간인 50명이 사망했고, 민간인 70명과 경찰 3명이 부상당했다."
(4.3사건 진상보고서 참조)
이 번 설 명절에 두 분 형님들이 회상하는 내용을 다시 들었는데,
당시 12살 정도였던 형님들은 직접 경험한 폭도 습격날을 또렸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날 아침에 '폭도야! 폭도야! 하는 소리와 함께
빨리 바닷가로 도망가라는 동네 사람이 외침을 들었는데
'탕'하는 총소리가 여러번 나면서 이웃집 '강00'이 총을 맞아 쓰러지는 걸 보았고,
친족 할아버지는 배에 총을 맞았는데 풀더미에 숨어 흙으로 총알 구멍을 막아서 살았다"
"구두미 바닷가 엉덕(위사진)에 숨어서 한 나절을 보내고 나와 보니
마을 집들이 다 불타버리고 5채만 남았고, 소와 먹을 것을 강탈해 갔으며
동가름(위미2리)에서만 23명이 죽었는데 총보다도 대창에 찔려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한달 후 명질 떡허는날(48.12.31일)에도
폭도들이 들어와 숨었는데 제사떡까지 약탈해 갔으며 그 때도 몇명 죽었고
위미지서에도 습격해서 수류탄을 던졌으나 불발로 피신했던 여러 사람이 살아났다"
"그 후에도 여러번 폭도들이 왔는데 군인들이 주둔하자 습격은 없어졌지만
군인들에게 쇠(소)잡아 바치고 떡 만들어 바치면서 더 힘들었다."
"그래도 군인들은 장교도 있으니 통제가 됐지만
글도 읽을 줄 모르는 피난민 출신 서북청년단은 무식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족족 훔쳐다 먹고 술 받아오라며 행패를 부렸다."
" 그 다음 해가 되어 토벌군이 이기고 있을 때
어느 날 저녁에 리민들을 전부 위미지서에 모이라고 했는데
지서 옆 잔디 밭에서 광목 스크린으로 활동사진(영화)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포로들을 20여명 끌고 와서 눈을 가리고 꿇려 앉혔는데
부모 형제가 피해를 당한 가족들은 모두 나와서 폭도들을 찔러 죽이라고 해
당시 아홉 살난 000에게도 창을 들고 사람을 찌르도록 하였다."
"그 포로들 중에는 이웃 산간 마을 사람도 있었는데
피해자들이 창으로 찔러도 죽지 않자 경찰이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 다음 날 마차가 있는 주민들을 동원해 그 20여구의 시체를 마차에 실어서
위미지서에서 북서쪽 300m지점(현재의 신광사 절터)에 파 묻도록 했는데
며칠 후에는 사망자 가족들이 밤에 몰래 숨어서 시체를 대부분 파갔다."
이것이 우리 마을 위미리에서 있었던 4.3사건 기막힌 사연 중에 일부이다.
얼마 오래지 않은 60여년 전인데도 이렇게 제주는 학살터였고
국가에서는 4.3을 변방의 일로 치부하여 버렸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할아버지들로부터 4.3이야기를 들었을때는
총을 쏜 사람, 초가집에 불을 붙인 사람, 소를 훔쳐간 사람과 죽창으로 찌른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직접 보았던 소문을 들었던 가해자와 피해자 대부분이 서로 아는 이웃 마을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순박한 우리 제주민들에게 총칼을 주면서 서로 죽이고 강탈하라고 한 자들은 누구인가?
미군정 반대? 5.10 총선 반대? 민주주의? 빨갱이 공산주의? 폭도? 무장 투쟁???
다 웃기는 일이다.
우리 할아버지들은 이런 사상이나 정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다.
제주의 4.3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고 예단해서는 안 된다.
이 처럼 피해자와 가해자가 혼재하여 당시 복잡한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4.3에 대한 책 몇 권 주어 읽고 아느체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직접 경험했던 형님네들은 왜 아무 말없이 걸어가고 있을까 >
4.3진상보고서에 의하면
1948년 4.3일
유격대 350여명이 무장하여 제주도내 경찰지서 12군대를 습격
경찰 및 우익인사들을 피살하는 것으로 시작된 4.3사건은
1954.9.21일까지 6년여 동안 지속되면서
이에 대응한 미군정 경찰과 경비군 및 서북청년단 토벌대에 의한
강경진압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
희생자가 당시 제주도민의 10%상당인 25,000명 이상으로 추정(신고 인원 15,100명)되고
피해자의 80% 이상이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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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는 우리 마을 위미리에 대한 문서와 증언이다.>
[22] [제주4.3 피해사례] 무장대의 살상행위 - 세화리, 남원.위미리, 두모리, 성읍리 사례
http://blog.naver.com/kolandnet/80128356336
(*주: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 원문상에는, 각주에서 각 사례마다 증언(채록), 문헌, 기사 등 자료출처 및 용어설명 등을 명기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편의상 생략하며, 원문은 글[6] 첨부파일 참조)
4‧3 무장봉기 초기에 무장대는 경찰, 서북청년회나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원, 그리고 군‧경에게 협조하는 우익인사와 그들의 가족을 지목해 살해했다. 그러나 1948년 11월 이후 무차별 토벌작전이 벌어진 이후에는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토벌대 편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위미리 등이 ‘토벌대 진영’이라 하여 무장대로부터 큰 피해를 당했다. 주로 군‧경 주둔지인데다 이들 마을에서 ‘도피자 가족’ 총살이 벌어지는데 대한 보복이었다. 무장대 세력이 궤멸 상태에 놓인 이후에는 굶주림에 처한 잔여 무장대들이 식량을 약탈하러 마을에 들어갔다가 보초서던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 남원면 남원‧위미리 사례
무장대는 1948년 11월 28일 오전 7시경 남원지서와 남원면사무소 소재지인 남원리를 습격했다. 당시 남원지서에는 응원경찰 20여 명을 포함해 약 30여 명의 경찰이 있었다. 무장대가 성담으로 둘러싸인 지서를 포위하자 경찰은 무장대가 물러갈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장대는 여러 시간 동안 마을을 휩쓸며 주민 30명 가량을 무차별 살해했다. 또 대부분의 집을 불태웠고 식량을 약탈했다.
무장대는 또한 이날 이웃마을 위미리도 동시에 습격했다. 위미리에는 위미지서가 있었다. 남원면의 전체 경찰지서 소재지 두 곳을 동시에 공격한 것이다. 강경작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때에 토벌대 주둔지가 동시에 습격당한 이 사건은 충격을 줬다. 미군 측에서도 주목했는지 비교적 상세한 보고서를 남겼다.
11월 28일 새벽 6시 무장폭도 약 200명과 비무장폭도 500명이 남원리와 위미리를 공격했다. 보고에 따르면 주택 250채가 폭도들에 의해 방화되었으며, 민간인 50명이 사망했고, 민간인 70명과 경찰 3명이 부상당했다. 경찰이 폭도들에 반격을 가했으나 탄약 부족으로 철수해야 했다. 경비대 1개 중대와 경찰 30명이 서귀포에서 증파되어 폭도들을 공격했다. 최근 접수된 보고에 따르면 이 작전으로 폭도 30명이 사살되었고 3명이 생포되었다고 하며, 경찰은 1명이 부상당했다.(경찰보고)
무장대는 남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위미리 마을을 휩쓸며 부녀자 등 노약자까지 살해하고 식량을 약탈하는가 하면 가옥에 불을 질렀다. 현봉협의 어머니는 이 날 불타는 집에서 식량과 옷가지를 꺼내려고 하다가 무장대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현봉협은 당시 위미리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위미지서장은 이북 사람이었는데 마을 청년들이 산쪽에 부화뇌동할까봐 지독하게 굴었어요. 조금만 의심스러우면 지서로 잡아갔지요. 그러니 다른 마을과 달리 위미리에는 산으로 오르거나 산쪽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엔 밤중에 산쪽에서 와서 교섭을 하려고 했죠. 그러나 워낙 지서의 단속이 심했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쪽에선 우리 마을 위미리가 자기들에게 협조를 안해준다며 불살라버리자고 한 겁니다. 가장 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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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언 록
1. 본인은 한때 교직에 있다가 퇴직하고 현재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2. 본인의 고향 위미리는4.3사건 당시 폭도 습격으로 피해가 많은 부락인데, 제1차 습격 때 폭도들이 위미국민학교가 전소되고, 인명 피해는 50여 명이 죽고 100여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부락민가는 좌익과 내통한 사람 집 5,6호를 제외한 750여 호에 1500여 채가 전소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되자, 부락 주위에 성을 쌓고 경비를 하게 되었으며, 본인의 부친 강ㅇㅇ(당시47세)는 이때 민보단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3. 1948년 12월 31일 저녁7시부터 9시 사이 두 시간 동안 제2차 폭도 습격이 있었을 때 저의 부친은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4. 본인의 부친은 그날 친족들과 여럿이 종손집에 있다가 폭도 습격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폭도들에게 붙잡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과 칼로 난자당하였는데, 시신을 수습하고 보니 손발은 물론 신체 부분 부분을 주먹만큼씩 여러 개로 도려내었으며, 심지어 성기까지 잘라버렸는데, 길에서 수습한 시신 덩어리는 5킬로그램을 넘을 정도였습니다.
5. 본인은 길옆에 내팽개쳐진 아버지 시신을 집으로 모시려고 시신을 업고 오는데 수십 군데 찔린 상처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내려 내가 신은 고무신으로 흘러드니 신발이 미끄러워 걸을 수가 없자 하는 수 없이 신을 벗고 맨발로 업고 집에 왔습니다. 사람을 죽이려면 그냥 목숨만 끊으면 되지, 인간의 탈을 쓰고 그렇게 천인공노할 정도로 잔인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6. 이날 위미리에서 폭도에게 희생된 사람은 모두 7명인데, 그중에서도 가자 참혹한 시신은 저의 부친이고, 그다음은 당시 의용소방대장이며 저의 사촌 형님 강위길과 동네 강관삼 씨 시신이 매우 험악했고, 나머지 4명의 시신은 그리 험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7. 폭도들은 시간상으로 볼 때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저의 아버지와 사촌 형님의 얼굴을 알고 집중 공격한 점으로 보아, 위미리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사람이란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8. 최근 이런 폭도들도 희생자로 신고했는데, 저는 이런 것을 지켜보면서 아버지 영전에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입니다.
2002년 5월 24일
증언자 주소 : 남제주군 남원읍 위미리
성명: ㅇㅇㅇ
[출처] 박근혜 대통령이 읽어야 할 제주4.3 (1) - 공비의 만행 사례 |작성자 한글말
http://ohyongtt.blog.me/120205101697
이 글은 제주도 출신 소설가 현길언 교수가 발행하는 '본질과 현상' 2013년 봄호에서 발췌한 것을 다시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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