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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제주의 감저(고구마) 공장

by 나그네 길 2015. 1. 19.

겨울을 군 고구마의 계절이다.

 

밤길을 걷다 장작불통의 고구마 굽는 고소한 냄새로 발길을 멈추고 

검댕이를 묻히며 껍질을 벗기는 그 달콤한 별미에 옛 추억을 떠 올리게 만든다.

 

제주에서는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지슬'은 감자를 말하는 대신 

 고구마를 '감저'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감저는 제주인들의 주식이었으며 생활경제의 밑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제주지역의 마을들은 반농 반어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으며

농업은 봄에 보리와 가을에 고구마가 주 산업이었다.

 

초 여름 보릿그루에 감저를 심으면 10월에 수확을 하게 되는데

집 옆에1.5m정도 땅을 파서 짚을 깔고 '감저눌'을 만들어 고구마를 보관하였다.

 

이 '감저눌'은 땅 밑 온도 변화가 적어 그런지 2월까지도 보관이 가능하였으며

감저눌에 보관한 고구마는 쌀이 없는 제주민들의 겨울 점심 식량이 되었던 것이다.

 

<고구마를 감저공장에 팔러온 장면>

 

그리고 고구마는 전분을 가공하는 '감저공장'에 팔게 되는데,

제주의 용천수가 흐르는 바닷가 마을에는 감저공장이 있었다.  

 

아래의 사진처럼 정방폭포 절벽위에까지 감저공장이 지어질 정도로

제주도 전체에는 수십개의 감저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1980년 대말까지도 정방폭포에 전분공장 건물이 있었다>

 

감저공장에서는 고구마를 트럭으로 운반하고 물로 씻어 전분을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마 찌꺼기 '전분박'이 많이 나와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그 당시에는 환경보호란 단어 자체가 없었을 때였다.

 

감저공장에서 쏟아지는 전분박이 그대로 바다로 흘러들어 오염이 되어도

어느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감저공장은 농한기 겨울철 마을 사람들이 주요 소득원이었다.

 

당시 마을 청년들과 비바리들은 감저공장에 취직하여 일을 하였고

그렇게 제주의 주요 농산물인 고구마를 가공하는 감저공장은 일제시대부터 오래 지속되었다. 

 

이러한 감저공장은

 1970년대 중반부터 농업구조가 보리와 고구마에서 감귤과수원으로 변경되면서

고구마 재배 면적이 줄어들자 스스로 문을 닫기 시작하였고

  

아직도 폐허가 된 감저공장들이 여렷 남아 제주도내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제주의 고구마와 감저공장을 거론할때면 반드시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서귀포에 있었던 전분으로 포도당을 가공하는 '선일포도당공장'이었다.

 

지금의 걸매생태공원이 있는 천지연 상류 300m쯤 되는 지역,

그 곳에 포도당 공장을 짓고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식에 직접 참석하였으니

당시로서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1968년 11.1일 준공한 포도당 공장은
감저공장에서 고구마를 이용하여 전분을 만들게 되면
그 전분으로 포도당을 가공하여 설탕 같은 제품을 만든는 공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식에 참석하여 치사를 했다시피

당시 제주도에서는 처음으로 보는 가장 큰 공장이었던 것이다.

 

<당시 포도당 공장 전경(사진 : 강병수)>

 

<감저빼때기(절간 고구마) ; 사진 강병수>

 

이렇게 제주의 고구마는 제주의 주요산업이었다.

 

고구마를 원료로 하는 포도당공장 준공식에 박대통령이 참석하고 치사를 할 정도였으니

당시 고구마가 제주민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 포도당공장도

제주에서 고구마재배 면적이 줄어들자 80년대에는 전북으로 이전하였고

그 후 한동안 감저공장은 제주에서 퇴출된 산업이었다.

 

그러나 최근 고구마가 자연식으로 인기가 높아져 재배면적이 늘어나는 추세이며

이 고구마를 가공처리 할 전분공장을 다시 가동하고 있다.

 

결국 20여년만에 1차 산업은 다시 바뀌었지만

이 고구마는 주식용이 아니라 판매용으로 대규모로 재배하는 실정이다. 

 

 

겨울이되면 생각나는것이있다.

 

점심때가 되면 반드시 올라오는 찐 고구마,

그리고 '감저빽대기'라고 부르는 절간고구마를 쪄서 한 끼를 때우는 것이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건강식인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먹을것이 모자라 배가 고팟었다는 기억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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