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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자연

제주의 초가집을 생각한다.

by 나그네 길 2015. 10. 12.

나는 초가집에서 낳고 자랐다.

 

1960년대 제주의 농촌은 대부분이 초가였고

국민학교와 면출장소 같은 공공기관 정도가 함석 지붕이었을 뿐이다.

 

 

제주의 초가집은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둥근돌과 흙과 나무와 새(띠)를 이용하여 집을 지었으며

바람이 많기 때문에 지붕을 바둑판처럼 단단하게 줄로 매었다.

 

그리고 울담은 돌로 약간 높게 쌓아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입구에는 정슬낭(정낭) 3개를 걸쳐 놓아 대문 역할을 하였는데,

 

집안에 사람이 없을 때는 정슬낭을 걸쳐 놓으면

지나가는 마소(馬牛)의 침입을 방지하였다.

 

 

물론 이웃에게도 집안에 사람의 없음을 나타내는 역할을 했는데

빈집털이 도둑에 대한 걱정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외지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가난한 살림에 잊어버릴만 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초가집 모형은 거이 대동소이하다.

 

돌담을 들어서면 "ㄱ"자 모양으로 초가집 2채가 있었는데

보통 남향 큰 집은 앙크레(안 집)였고 서향 작은 집은 바끄레(바같 집)였다.

 

앙크레에는 구들(방) 2개와 상방(나무마루) 그리고 정지(부엌)와 고팡(광)으로 구분되며

상방과 마당 사이에는 난간(툇마루)이 있다.

 

바끄레에는 구들 하나, 창고겸 쇠막(소 움막)으로 활용하였고

옆에는 돼지를 키우고 화장실 역할을 하는 도통(통시)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초가집 마당은 단단하게 다진 땅 위에 보리짚을 깔아 놓았으며,

보리짚 마당은 흙 먼지가 날리는 것을 방지하고 멍석에서 곡식을 말렸다.

 

마당 한 쪽에는 우영팟(텃밭)과 함께 

검질(땔감용 마른 풀을 쌓아 놓은 가리)과 쇠촐(소먹이 마른 풀을 쌓아 놓은 가리)이 있었다.  

 

 

(위 사진 : 카이세키 소라 (sora195212)블로그에서)

 

쇠막에는 늦 가을에서 이른 봄까지 소를 묶어 놓고 키웠는데

하루에 세번씩 쇠촐(꼴, 먹이)을 주어야 했다.

 

이러한 쇠촐은 가을에 중산간 지역의 목초을 베어 말린후

마차에 실어 집에 가져와서 눌(가리)를 쌓아 겨우내 보관하면서 먹이로 사용한다. 

 

초가 지붕은 1년에 한 번씩 갈아주어야 한다.

 

가을에 곧게 자란 새(띠)를 베어 잘 말려두었다가 음력 정월 쯤에 지붕을 새로 덮어 주는데,

먼저 초가지붕을 바둑판 처럼 묶어 주어야 하는 집줄을 준비해야 한다.

 

초가 집은 대부분 직사각형이기 때문에

집줄은 긴 거 20개 정도 짧은 거는 25개 정도가 필요하다

 

집 줄은 새(띠)를 '호랭이'라는 기구를 사용하여 빙빙 돌려 엮어서 만드는데,

보통은 4명이 하루 종일 걸리는 '집 줄 놓기 작업'을 해야 한다.

 

 

 

초가지붕은 이는 날은 바람이 없어야 한다

 

먼저 1년이 지난 집 줄을 잘라 버린 후,

지붕 위에 올라가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새를 살살 펴면서 덮어 준다.

 

지붕에 새를 덮으면서 큰 줄 작은 줄 어긋나게 묶어 주면 된다.

그래서 오래된 초가집일 수록 초가 지붕이 두텁게 된다. 

 

 

 

이렇게 다시 새로 갈아준 초가 지붕은

눈과 바람 그리고 장마와 태풍을 견디면서 제주민들에게 안락한 주거 공간을 보장해 주었다.

 

 

어린 날 우리 동네에서 초가 집을 짓는 것을 보았다.

 

초가 집은 상모루를 먼저 만들어 세우고 4개의 기둥을 받쳐 준 다음,

삼나무를 이용하여 지붕의 서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흙에 보리짚을 썰어 넣고 밟아서 진흙을 만들어

초가집 외벽은 시멘트 대신에 진흙을 발라 돌을 쌓아 올렸다.

  

 

초가집의 내벽은 나무를 촘촘하게 얽어 놓고

양쪽으로 진흙을 두텁게 바르면 마르면서 단단한 벽이 되었다. 

 

구둘(방) 바닥은 평평한 돌을 이용하여 구들장을 만들고

그 위에 진흙을 곱게 발랐는데 잘 마른 다음에는 종이를 여러겹 발라 감물을 들였다.

 

그리고 구들장은 부엌에서 밥을 지으면 온돌이 되는 구조였다.

   

 

상방의 마루는 널판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상방의 앞뒤로 나무 문을 만들어 달아 놓았는데

이 문은 여름에 시원하기는 했으나 겨울에는 겨우 바람만 막아주었던것 같다.

 

그리고 천정은 상모루와 서리가 보이는 구조였는데 보통은 종이를 발랐다.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방문이었다.

 

아래 사진처럼 생긴 외문인데 겨우 창호지를 한 장을 발라 놓았으니

겨울이 되면 얼마나 추웠을까?

 

겨울날 아침이 되면 코 끝이 시리고 입에서 김이 나왔던것 같은데,

그렇다고 창호지를 여러장 바르면 방이 컴컴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아래의 나무문은 어릴적 내가 살았던 초가집의 방문이다

새 집을 짓기 위하여 초가를 헐어 버릴 때 가져 왔으니 이제는 골동품이 다 되었다.

 

 

제주의 초가집은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특히 돌과 흙으로 만든 집 내벽은 살아 있는 벽이었다.

 

추위와 더위는 흙벽에서 걸러지면서 상온을 유지해주었으며

습기도 계절에 따라 흡수하고 뱉어 주면서 습도를 유지해 주었다

 

그래서 장마철에도 그리 칙칙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논 초가성당 복원 조감도)

 

이제 제주의 정통 초가집은 성읍민속마을 외에는 거이 찾아 볼 수 없다.

 

새로 만들어진 초가집들은 보리짚을 넣은 흙벽이 아니라서

집벽이 함께 살아 숨쉬는 것 같지도 않다.

 

 

제주 초가집의 주 재료는 돌과 나무와 흙과 그리고 새(띠)였기에

인간에게 어울리는 자연적인 주거 환경이 되었던것 같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어렸을적에는 아토피나 눈병 그리고 감기 조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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