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산길을 걷다보면 이상한 곳에서 돌담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한라산 둘레길 깊은 숲속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돌담이 있는 것을 보면
누구나 의문을 가지게 된다.
누가 이런 장소에 무슨 목적으로 힘들게 돌담을 쌓아 놓았을까?
돌담의 주변은 온통 큰나무들로 가득차 있고
사람들이 다닐만한 오솔길 조차 없는 깊은 산속에 오래된 돌담들!
아무리 돌이 많다는 제주이지만 이런 숲속에까지 돌담을 쌓아둘 필요가 있었을까?
내 어릴적에는 이러한 돌담들을 '잣담'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잣성이라고 알려져 있는 잣담은
돌을 높이 쌓아 마을의 마장(목장)을 구분하였으며 소와 말을 놓아 기르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잣담이 왜 한라산 중턱에 있을까?
잣담은 하잣담, 중잣담, 상잣담으로 구분한다.
이 중에서 마을에서 가까운 하잣담(해발 200m정도)은
마을의 밭과 알마장(목장)을 구분해 주는 돌담으로 높이 2m, 길이5km 정도로 이어진다.
이 알마장에는 쇠테우리(목동)가 마을의 소들을 몰고가서
하루종일 놓아 먹이는 초지로 활용되었다.
중잣담은 하잣담보다 더 높은 지대(해발 400m)에 담의 높이도 좀 더 높다.
이 중잣담은 '알마장'과 '웃마장'을 구분하는 담이며
웃마장은 소를 여러 달 놓아 키우는 목적으로 활용되는 초지이다.
봄에 웃마장에 풀어 놓았던 소들은
가을이 되면 주인이 다시 찾아 집에 있는 쇠막에서 겨울을 난다.
그런데 내 어릴적에도 상잣담에 대한 기억은 없다.
제주는 고려시대부터 넓은 초지를 이용하여 말을 키우는 목장이 운영되었다.
그래서 한라산을 중심으로 중산간 초지를 삼등분하는 상, 중, 하잣담을 쌓았고
그 잣담을 기준으로 마장(목장)을 구분하여였다고 한다.
지금은 한라산 둘레길 해발 500m 정도에 상잣담을 쌓았으니
옛 날 한라산에는 나무가 얼마 없었으며 제주도 대부분이 넓은 초원이었던것 같다.
하긴 50년전만 해도 제주에는 나무가 거이 없었다.
집에는 집담을 쌓고 밭에는 돌담을 쌓아 바람을 막는 역할을 하였을 뿐
나무를 찾아보기 힘들어 일주도로에서 바다까지 보이는 풍경이었다.
특히 제주의 거센 바람과 땔감을 연료로 사용했던 나무들은 자랄틈이 없었던것 같다.
그랬던 제주에 나무들이 우거지기 시작한 것은
4.3사건과 정부의 산림녹화 그리고 감귤과수원 방풍림 조성 덕분이다.
4.3사건 당시 토벌군은 폭도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중산간 지역에 있던 마을들을 강제로 해안가로 소개(
산림에 대한 훼손이 줄어 들면서 나무들이 자라나게되었다.
그리고 새마을 운동 당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던 산림녹화운동,
집집마다 학교마다 직장마다 사람들마다 의무적으로 몇그루의 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그래서 지금 제주의 오름 대부분은 당시 심었던 소나무와 삼나무에 의해 우거졌다.
제주의 대표산업 감귤과수원,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과수원에 방풍림이 빽빽하게 심어졌으며,
땔감이 연탄과 석유로 변화되면서 한라산 하부에도 숲이 생성되었다.
결국 한라산 둘레길 상잣담 주변의 나무들은 수령이 5~70년생 정도이다.
그 이전에는 한라산 중턱까지도 초원이었다는 말이다.
이제 제주의 잣담은
당초 소와 말을 키우기 위한 마장(목장)으로서의 효용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그 잣담을 활용하는 숲길이 만들어 지면서
이 가을에 계절을 느껴 볼만한 길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다는 삼다의 섬 제주,
그 제주의 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제주인들과 함께 살아 가고 있다.
이렇게 몽골족 시대부터 쌓아 왔던 제주의 잣담은 세계적인 목축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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