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어머니의 추억

by 나그네 길 2017. 7. 12.

지난 어버이날에

고향 위미리에서 살고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 뵈며 생각하였다.


"향년 104세 장수하신 어머니를 내년 어버이 날에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지난주에 어머니께서는 영면하셨다.


1914년 4월에 태어나시어

역사적인 3.1운동과 8.15광복 그리고 제주4.3사건과 6.25전쟁을 체험하셨고


천지개벽과 같은 제주개발의 시기에 숨가쁜 삶을 살면서도 천수를 누리셨으니

당신의 생은 참으로 파란만장 하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방년 17세에 남원읍 태흥리 경주 金씨 본가에서

위미리 '큰알녁집' 吳씨 집안 둘째 며느리로 들어와 90여년을 사셨다.


당시 제주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가난의 시기가 1960년대까지 이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존귀함을 아셨는지 무려 10남매를 낳아 키워주셨다.


6남4녀의 형제자매 중에 나는 5남으로 8번째 자식이다.

    


최근에 어머니께 들었던 나의 탄생비화는 기가막히다.


음력 7월 25일은 무더운 여름밤이다.

만삭의 더위에 지친 어머니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겨우 잠을 청하였는데,

한 밤중에 진통이 오기 시작하자 기면서 방으로 가다가 마당에서 나를 출산하였다는 것이다.


엽집 아줌마가 땅에 떨어져 먼지가 가득 묻은 영아인 나를 보면서

"에고 애기는 무사 영 시커멍허게 나수가?"(아기가 왜 검게 태어났느냐?) 



"출산 중에 땅에 떨어지면서까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리고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나를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께 한없는 감사드립니다.



30여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천주교 세례를 받았듯이

어머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가톨릭교회 대세와 종부성사를 받으셨다.


이에따라 교회의 전통적인 연도기도와 고별예식을 드릴 수 있었고,

효돈성당 장례미사에는 4분의 사제가 공동집전하는 장엄한 미사로 고인을 보내드렸다


  


10남매 중에서 여덟번째인 나부터는 3남매는 천주교신자이다. 


그리고 아버님이 천주교 세례를 받아서 였는지

나의 다섯 형제의 아들들이 모두 가톨릭교회 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손주까지 4대째 천주교 집안이 되었다.


그래서 어머님의 영결예식을 천주교 장례미사로 드릴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교와 유교를 신봉하는 다른 형제 자매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재래식 상복과 두건을 쓰고 가시나무와 대나무로 방장대를 만들었으며,

딸 상주들이 의견을 존중하여 상위에 '혼적삼'을 놓게하였다.


아마 하느님께서도 우리 형제자매들이 장례절차로 불화를 이루는 것보다는

서로 화목하게 어머니의 영혼을 보내드리는 사랑의 모습을 기쁘게 받아드렸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보면서 효자는 부모가 만들어 주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께서는 104년을 사시는 동안 당신이 손수 식사를 하셨고

고손까지 103명에 달하는 자손들이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면서 세배돈을 챙겨 주셨으며,

올 설날에는 제주 국제학교 NLCS 외국인 교사들의 세배도 받아 보셨다.



지난달 서귀포의료원 간병통합병동 입원하여 45일여 만에 돌아가셨으니

당신이 돌아가시면서까지 전혀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수천만원에 달하는 의료와 장제비에 충분한 예금통장을 마련해 두시기까지 했다.



어느 유명한 문화기획가님이 어머님 장례식에 왔다가

대번에 '호상(喪)"이라 말하며 전반적인 장례절차를 동영상으로 기록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별처럼 많은 자손을 낳아 번성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신 어머님을 기쁘게 보내드리면서

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이 아니라 천상낙원의 하느님 나라를 찬양하는 축제를 지내야 한다.   

 


천주의 성인들이어 오소서, 주의 천사들이여 마주 오소서

이 영혼을 부르신 그리스도님, 이 영혼을 받아들여 주소서.


주여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