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성읍민속마을은 내가 잘 아는 지역이다.
오래 전 나의 둘째 처제가 시집가 지금까지 거주하는 초가 마을이며
덕분에 나도 수십 번도 더 다녀 보았던 마을이다.
그런데 우연히 서귀포시민학교 프로그램 '성읍민속마을 탐방'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평소에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였던 것들을
좀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든 보람있는 일정을 가졌다.
성읍민속마을 현장 탐방은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김은석 교수의 인문학 성찰 강의와 함께 이루어 졌는데
제주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알기쉬운 해설은 일품이었다.
성읍민속마을은 제주의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조선 세종조 설촌 당시부터 영주산과 천미천을 가운데 두고
원형으로 읍성을 쌓았는데 풍수지리에 배가 다니는 행주형 지형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강하게 드는 의문이 있다.
예부터 제주의 마을들은 물을 구하기 쉬운 바닷가 주변이었으며
제주목과 대정현 역시 풍부한 용천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발달해 왔는데
성읍은 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물이 귀한 중산간 지역에 이루어 졌을까?
김은석 교수는 성읍 현감이 마셨다는 '원님물'에서 해답을 주었다.
성읍마을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온 마장(목장)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만들어 졌으며
물이 귀하여 빗물을 초가와 나무에서 받아 항아리에 고여 마셨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마장이 없어져 버린 일제시대 이후 성읍마을은 쇠락을 거듭하여
서귀포와 성산을 포함하는 정의현청이 있던 읍성에서 일개 마을로 전락해 버렸으니
소위 행주형으로 명당터라는 풍수지리도 믿을게 못된것 같다.
배가 나아가고 있다는 행주형 마을에는
배가 침몰할까 우려되어 우물을 파서는 안된다는 속설이 있으며,
또 성읍마을 가운데는 배의 돗대를 뜻하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어 풍취를 더한다.
성읍민속마을은 오래 전과 다르게 많이 복원되어 있다.
남문을 짓고 읍성을 새로 쌓았고 객사도 건축하였으며 많은 초가집과 도로들이 새로 정비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복원된 성읍마을을 둘러 보면서 이상하게도 어색한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왠지 어릴적 내가 보았던 우리 제주의 포근한 농촌마을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육지부의 어느 민속촌을 떠 올리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성읍민속마을의 남문은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의 동문(낙풍루)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남문의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이 성문을 감싸고 있는 것도 같다.
제주목이나 대정현에도 성문 앞에 옹성이 있었는가?
성루와 붉은 깃발까지도 낙안읍성과 어이 그리도 같은 분위기이다.
<위 : 성읍마을, 아래 : 낙안읍성>
성읍민속마을의 객사는 전주에 있는 객사(풍패관)의 모형을 그대로 따온것 같다.
객사입구를 자연석으로 깔아 들어 올때 허리를 숙이고 조심하라는것 까지도 같다.
성읍에서 현감이 정무를 보던 '일관헌'보다 객사가 더 크고 웅장한 것도 이해가기 어려운 부분,
결국 이형장 목사의 탐라순력도에 그려 있는 객사와는 전혀 다르게 복원되었다고 한다.
<위 : 성읍마을 객사, 아래 : 전주 객사 풍매관>
제주를 대표하는 성읍민속마을은 가장 제주다워야 한다.
육지부에서 웅장하고 멋있다고 알려진 역사적인 건축물들보다도
비록 빈약하고 초라한 초가와 돌담들도 그것이 제주다움이 있다면 더 좋고 더 아름다운 것이다.
복원(復元)이란 사전적으로 "사물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림"을 말한다.
따라서 복원에 가장 유의해야 할것은 원래의 상태를 연구하고 확인하는 절차일것이다.
성읍민속마을 복원이 더 이상 제주다움을 잃어 버린다면 많이 아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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