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정방폭포 주차장 옆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해상 조난사고였던 여객선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이 있다.
<사진 : 무용가 박연술 교수, 체육학 박사>
오늘, 1970년 12월 15일 서귀포- 부산 정기 여객선 남영호가
여수 동남방 해상에서 침몰되어 여객과 선원 등 323명이 희생된지 49년째 날,
제주의 저명한 무용가 박연술 선생님이 페북에서
남영호에서 돌아가신 부친이 기일이라는 포스팅을 보면서 어릴적 기억을 떠 올렸다.
우리나라에서 해상 조난사고는 당연히 세월호를 말한다.
그러나 40여년전 남영호 역시 적재량을 초과한 밀감상자 과적과 항해 부주의,
그리고 해상 구조 지연 등 조난 사유는 세월호와 같았다.
남영호 침몰사고에는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던 우리 옆집 해군사병도 희생을 당했으며,
출항전에 쥐들이 배에서 내렸다는 등 흉흉한 유언비어들이 난무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
희생자들에게 변변한 보상도 없이 가족들에게 슬픔만 안겨주었다.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도
당초 서귀항에 세워졌다가 항만공사를 이유로 멀리 중산간 공동묘지 상효로 옮겨 버리기도 했다.
<위: 서귀항 위령탑, 아래: 상효위령탑>
세월이 다시 흘러 언론과 희생자 가족들이 요구로
2014. 12월 서귀포항이 내려다 보이는 이 장소에 위령탑을 세우고 희생자들이 넋을 위로하고 있다.
위령탑 건립 추모행사에서는
남영호 희생자의 딸이었던 박연술 선생님이 진혼무를 추어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남영호 조난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라디오를 통하여 남영호 사고 소식을 들었고
40년이 지난 후 서귀포경찰서 상황실장 재직 시에는 TV영상으로 세월호 조난 사고를 보았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음에도 사고의 원인과 대처방법에 변함이 없었음을 한탄했을 뿐이다.
"보따리 장수 홀어머니 바다에 묻은 세 아이
그 눈빛 그 어깨울음 불뿔이 흩어진 골목
마당귀 유자 몇 알이 장대만큼 솟았는데
아 어느 이름인들 눈부처가 아니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못했어도
내 아직 이승에 있을때 이제 그만 돌아오라."
오승철 작, 그리운 님(남영호 조난자 넋을 추모하며 중에서)
서귀포-부산 정기 여객선 남영호 조난 반세기를 앞두고
다시는 이 땅에 남영호와 세월호 같은 해상 조난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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